●──── 신약강론/히브리서

49. 히브리서 12:9-13 의의 평강한 열매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09

히브리서 49

의의 평강한 열매

히브리서 12:9-13


아무런 결과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어떤 일에 자신의 것을 투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투자를 하였으면 그에 따른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불리기 위하여 돈이 될 만한 곳에 투자를 합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받는 상급을 많게 하려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상급이 주어지기 때문에 각기 이 땅에서 봉사하고, 교회를 위해서 일한 것에 따라서 상급의 차등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은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상급은 없고 상만 있을 뿐인데 그 상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면 막 화를 냅니다. 성경에서 하늘나라의 상급과 그 차등을 말씀하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항변합니다. 이제까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주워들은 지식을 바탕으로 상급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렇게 항변하는 내심은 자신이 이제까지 하늘의 상급을 위해 쌓아온 공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당하기 싫은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그것이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최소한의 투자를 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것이 우리의 죄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였으면 반드시 그 결과가 주어지게 되어 있는데 결과를 기대하는 그것이 왜 나쁩니까?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결과를 기대하되 항상 내 중심에서 생각하고 유익을 바라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지는 결과가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행동에 대한 결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항상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유익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주님으로 인해 자신에게 좋은 것들이 주어지기를 끊임없이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 어떤 좋은 것들이 내게 주어질까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늘 자기중심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랑이 앞서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거리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1:10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께서 일하시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종의 자세는 주인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신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기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우리의 편안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목적으로 일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과 영광의 만족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 안에 하나님 자기 백성들의 죄 사함과 구원이라는 놀라운 은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아직도 나 자신의 유익과 나의 편안함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안주하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일에 참여시키려고 구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복음을 확장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어도 충분히 자신의 복음을 드러내시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천지창조는 전혀 인간의 도움 없이 하나님 홀로 이루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진 피조 세계를 다시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키시는 새로운 창조 역시 하나님 홀로 이루십니다. 거기에 인간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일이 주님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실 때에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시려고 하는 주님의 방해꾼이 12제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 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성의 가장 확실한 상징입니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은 십자가 앞에서 말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한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항목입니다. 예수 믿어서 잘 살아 보겠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생각입니다. 예배 드려서 우환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은 우상숭배의 마음입니다. 헌금하고 봉사해서 하늘의 상급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죄악된 세상에서 남을 누르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며 자기 명예를 내세우려고 하는 탐욕입니다. 성도란 자신과 가족의 유익을 기대하고 좋은 것이 베풀어지도록 구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아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징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의의 평강한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의 평강한 열매는 우리가 보기에 하나도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기독교 혹은 교회적인 종교심에 젖어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의의 평강한 열매란 이 땅에서 볼 때에 좋은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일단 의의 평강한 열매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전혀 좋은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적으로 볼 때에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의 평강한 열매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12장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경주라는 운동경기에 비유하여 믿음을 설명하는 특징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평강한 열매란 운동 경기가 다 끝난 후에 승리한 선수가 누리는 휴식과 긴장 이완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의 열매는 바울 사도가 그의 인생 경주로의 종착점을 의식하면서 한 말 속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바울 사도가 주님의 영광 중에 자기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의의 면류관을 이야기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의의 열매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도 이미 오래 전에 의와 평강을 연결하여 선포한 바가 있었습니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32:17). 선지자가 외쳤던 의와 평화는 메시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원한 나라의 특징이었습니다. 고난과 여러 가지 역경 속에서 승리하여 주님 앞에 선 상태가 바로 의의 열매요 평강한 열매인 것입니다. 야고보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1:12).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이란 동일하게 생명을 누리는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의의 평강한 열매가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까? 9절에 보면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기 아들들에게 징계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아들과 같이 자기 백성들을 대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12:7).

출애굽기 4:22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장자, 즉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라고 하는 선언을 하신 것은 이제 앞으로 이스라엘을 가나안까지 어떻게 이끄실 것인가 하는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즉 징계를 하시는 아버지로서 이스라엘을 가나안까지 이끄시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할지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원수 관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사랑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와야 했습니까?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온전한 아들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아들 노릇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아들이 와야 했던 것입니다. 온전한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완벽한 아들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였다고 이미 앞에서 밝히고 있었던 것입니다(1:2, 5).

이 땅에서 육신적인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여 바르게 키우려고 한다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기 위한 징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이 땅에서 인간들이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한다고 하는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에게는 징계라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 나라의 영광에 비교해 본다면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8:1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자기 백성들을 아들로 대우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인 성도들을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하늘의 보좌에서 거룩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것처럼 자기 자녀들을 그의 거룩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의의 평강한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의 평강한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에 의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주시고 감당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내가 이루어야 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열매는 없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의 아버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느끼고 깨달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하나하나 인정해 갈 뿐입니다. 이 땅에서의 아버지에게도 복종한다면 거룩에 참여케 하시기 위하여 징계하시는 아버지를 어떻게 내 쪽에서 외면하고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징계가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 자녀, 자기 백성들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오늘도 우리는 붙잡힌바 된 것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마음대로 좌절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포기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이미 붙잡힌바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뜻을 좇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3)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무수히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죽임의 문턱까지 수없이 갔었습니다. 그러한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1:8,9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바울이 고난 중에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만이 바울을 거룩에 참여케 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18)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었는가를 알고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피곤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그렇게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는 항상 나를 위한 내 중심의 좋은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가 가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내게 좋으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희생하셔서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징계하셔서 거룩을 이루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부름받았습니다. 우리에게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자기 영광, 자기 열매를 반드시 찾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