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48.히브리서 12:4-8 주의 징계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06

히브리서 48

주의 징계

히브리서 12:4-8


과거에 공익 광고 중에서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와 함께 전철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면서 신발을 신고 의자 위를 마음대로 뛰어다니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이 드신 어른이 아이를 야단치자 도리어 아이의 엄마가 나이 드신 분에게 우리 아이 함부로 기죽이지 말라고 대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내 아이가 귀엽다고 기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하게 두는 요즘 실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공익 광고였습니다.

옛날과 달리 요즘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를 하나 아니면 둘 낳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식을 아주 귀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죽어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뭐든지 마음대로 하게 둡니다. 용돈도 마음껏 쓰도록 주고 사달라고 하는 것들은 다 사줍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이 어릴 때에 사람들에게 형제들 틈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자랐다는 피해 의식이 있습니다. 또한 옛날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풍부함을 누리지 못한 설움이 있어서 우리 아이들 세대에서는 그러한 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을 보면 학원도 몇 개씩 다닙니다. 피아노, 태권도, 영어, 컴퓨터, 바둑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많이 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학원비를 충당하고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자는 마음 때문에 돈벌이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고 있고 부모는 아이들의 사교육비를 부담하기 위하여 돈벌이에 열심을 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모든 방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죽지 않게 살기를 원하는 우리의 마음 때문에 아이들을 그렇게 내몰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려고 하는 것은 힘을 축적시켜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회적인 힘은 돈입니다. 지금 다재다능한 아이로 만들어 주어서 나중에 그 다재다능함을 가지고 스스로 물질의 풍부함을 누리고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힘이 상대방에게 눌리지 않고 상대를 누르고 살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지금 아이들은 무척 귀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혹시 학교에서 선생님에게나 다른 아이들에게서 맞고 오면 당장 학교로 달려갑니다. 나도 아이들에게 한 번도 매를 댄 적이 없는데 그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선생님에게 맞은 아이가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습니다. 물론 전부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사례들이지요. 그렇지만 그러한 마음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수많은 피해를 주면서 살아도 그러한 것들을 별로 의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죄의 본성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집 아이들을 볼 때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럴 때에 저는 이런 생각들이 많이 듭니다. 우리 아이들을 너무 약하게 키우는 것은 아닐까? 너무 인내심이 없고 나약한 온실 안의 화초와 같은 아이로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자기 자신만 아는 존재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가끔씩 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냥 두다가는 정말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멍청한 아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고된 훈련과 강하게 키우기 위하여 따로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의 모든 것들을 점검하고 철저히 부모의 계획된 교육의 카테고리 안에서 양육을 해야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우리 아이들 자체를 항상 너무 크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검이요 확인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앞일을 따지고 생각하다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빠른 변화의 시대에 얼마나 적응하면서 살 수 있는 아이들로 키울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지경입니다. 어떻게 앞일을 구체적으로 설계해서 아이들을 모든 방면에 다재다능하게 키울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돈을 투자해야 훌륭한 아이로 키울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이 물질만능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잠언 23:13,14에 보면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20:30에서도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매를 가지고 때리는 훈계를 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가지고 무조건 매를 가지고 때리면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을 매로써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음부, 즉 죽음에서 구원하는 행위로 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속에 깊이 박히도록 말씀을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뜻입니다.

저도 우리 아이들을 야단치고 매로 때리면서 말씀의 의미가 얼마나 폭넓게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잠언 20:30에서 말씀하고 있는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는 말씀이 단순히 매를 맞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가르치는 자의 교훈이 깊이 박히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서는 그러한 의미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매를 때리는 자에게나 매를 맞는 자에게나 동일하게 깊이 박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이 십자가의 의미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독생자를 때리신 현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실 때에 그 매는 하나님의 마음속에도 깊이 박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베들레헴에 두 살 이하 아이들이 희생되는 성경 구절들을 읽을 때에 하나님이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에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을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희생된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 드러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아픔을 겪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아픔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오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으로 말미암아 겪으신 아픔을 담고 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록자는 믿음의 조상들이 어떤 아픔을 겪었는가를 11장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살펴 본 3절에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에 대하여 타성에 젖는다는 것은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도 계속되는 고난과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피곤하여 낙심되는 상황으로까지 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히브리서 기록자는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믿음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록자가 보고 있는 것은 앞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구약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싸웠고 고난을 당했고 죽임을 당했던 것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그러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4). 신약의 성도들이 싸운 것이 피흘리기까지 싸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2-34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나 지금껏 자신들이 고백하는 믿음의 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하는 시험을 당한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들이 겪었던 그러한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대속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 고난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고난은 제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고난과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매로 훈계하며 양육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자기 자녀로 삼아 징계를 하시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히브리서 기록자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잠언 3:11,12의 말씀인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는 말씀입니다.

5,6절에 보면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외부적인 박해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성도들이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나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내버려두신다는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참 아버지로서 자기 백성들을 참 아들로 상대하시는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징계는 아버지가 가혹하고 무자비하다는 표시가 아니라 아들의 행복에 깊은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 땅의 아버지가 그러할진대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위하시는 것이 오죽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9-11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생각한다면 어찌 낙심할 수 있으며 좌절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오는 불신앙적 대적들은 언제나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을 늘 좌절케 하고 낙심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뒤바꾸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유익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요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표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고 급기야는 십자가의 죽음에 내 던지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아니 세상에서 편하게 잘먹고 잘 살도록 내버려두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던지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징계를 허락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에서 징계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잠언 13:24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결코 내버려두신 사생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7,8).

그러므로 성도에게 오는 고난과 여러 가지 어려움, 또는 더 나아가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 사실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7:14-19).

그리고 요한복음 17:23에 의하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다른 거꾸로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가 하는 것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주님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자랑을 하는 것으로 일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는 것은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주님을 자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주가 우리 안에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님이 우리를 장악하고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만 알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주님이 우리 안에 들오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고 십자가의 주님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보는 자가 다른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주님만 보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주님만 자랑으로 삼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징계는 단순히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이끌고 계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주님을 위해,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징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이런 말씀을 보았을 때에 우리는 지금 너무 편하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시다. 피흘리기까지 복음을 위해 싸운 적이 있습니까? 자녀를 매로 다스리고 양육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자녀를 때리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나를 위해서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증거하겠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성도의 심정입니다. 다시 베드로 사도의 외침을 들어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