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47.히브리서 12:1-3 믿음의 주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04

히브리서 47

믿음의 주

히브리서 12:1-3


믿음을 말하자면 허공에 떠있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말해지고 이해되는 것이 보통인 것 같습니다. 허공에 있는 그 어떤 것,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하늘의 것을 막연하게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맹종하는 것으로 믿음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알면 믿음이 생기는 지식적인 차원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또한 뭐든지 가능하다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 있는 자의 모습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버스를 타고 다닐 때에 사고가 나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식으로 믿음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성경이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맹종이요 허세이며, 자기 최면이고, 확률에 불과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버스가 사고 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타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버스가 사고가 났다면 그 중에 믿음이 없는 사람 때문에 사고가 난 것입니까? 아니면 반대로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그 버스를 탄 사람들이 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매사가 우리의 믿음에 의한 결과로 생성되는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결코 그런 식으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초두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2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은 바라보는 것의 실제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실제적이요 지금 내게 주어진 증거입니다. 증거란 나하고 관련이 없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내게 손에 쥐어져 있고 붙잡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란 허공에 떠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들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오랜 시간(13)동안 히브리서 11장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1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믿음의 조상들의 삶이 곧 우리들의 삶인데 그것이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으며 결국에는 죽음까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이란 막연하게 하늘의 것을 붙잡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땅에서의 고난과 죽음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고난과 핍박, 학대, 죽음이 믿음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38)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믿음이란 결코 감상적인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다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정도의 차원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임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당하는 고난이요 역경이며 심지어는 죽음으로까지 연결되는 삶이 믿음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 증거들의 우리에게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조상들이 살았던 것과 같은 증거들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지식적으로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착각할 것이 아닙니다. 삶에 관한 문제, 여기까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1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온 실제적인 모습이 내게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내게서 어떻게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분을 믿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만 그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게 합니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증거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을 때에 고난과 죽음이라는 자리까지도 기쁨으로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믿음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의 붙잡고 있고 그들을 이끌고 있을 때에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들을 거쳐야 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부활로 다시 목숨을 돌려받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자들에게는 악형을 구차히 면하지 아니함으로 죽음을 순순히 받아 들여야 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희롱과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시험, 돌에 맞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칼에 죽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믿음이 주어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이라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믿음이 주어진 자들에게 이러한 고난과 역경, 어려움, 심지어 죽음이라는 것까지 주어지고 또한 성도는 그것들을 순순히 아니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것이 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답이라는 말입니다.

왜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니 왜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난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 답변이 바로 2절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모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결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일이 다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말미암아 더 이상 다른 제사가 요구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신 그 제사로 모든 것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약속의 성취의 절정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와야 했던 모든 것들은 바로 약속의 성취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것은 증인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구약의 성도들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약속의 성취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무엇을 증거하는 증거자들이라고 하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증거자들은 많은 고난을 당했더랬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며 어려움을 당할 때에 많은 증인들을 보면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던 그들의 삶이,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치러야만 했던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감상에 불과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집중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결코 구약 시대에 믿음으로 살았다는 허다한 증인들의 위대함이 아닙니다.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관심가지고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할 자들이 결코 그러한 증인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고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분은 증인들이 증거하고자 했던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 배후에 계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믿음의 실체가 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11장을 다 기록한 이후에 여기서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바라보았던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극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다 읽고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자!’ 혹은 구약의 이러한 믿음의 조상을 따라 우리도 순종하자!’라는 생각이 든다면 히브리서 11장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었을 때에 그렇다면 믿음이 누구인가?’라고 결론이 나야 합니다. 그래서 12:2을 보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에게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믿음으로 이끄신 온전한 믿음이라 무엇인가? 아니 온전한 믿음을 어디서 보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되어져야 합니다.

12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어디서 가장 잘 볼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게서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주가 되셔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삶을 통해 가장 적절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십자가의 처참한 고난을 인내하셨으며 죽음을 믿음으로 순순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믿음을 시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온전히 이루신 분이십니다. 믿음의 출발에서부터 그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온전함에 이르셨습니다(5:8,9). 이제 모든 신앙의 경주자들은 오직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11장에서 열거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하면서 죽음까지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좇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속에 심겨진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 히브리서 기록자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록자가 쓰고 있는 믿음이란 말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신실하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다이내믹한 개념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성도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모두가 다 구약의 성도들을 부러워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사사건건 눈에 보이도록 간섭하셨고 피부로 절감할 수 있는 이적들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구약 시대가 훨씬 믿기가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은 한결같이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성도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약 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된 것을 알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좋은 것’(11:40)을 받은 자들입니다.

온전히 이루어진 것을 받았기에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 불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물론 이 말이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불확실한 것이 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드러내신 약속대로 그들에게 있어서 그 하나님의 약속들이 온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도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합니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달려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자리까지 가야합니다. 저는 지금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더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의 출발이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또한 삶의 모든 방법도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성도의 삶의 목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3:12-14)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바울 사도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화를 더 이루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 붙잡혀 있고 그분에 의해 달리 다른 길을 찾을 수 없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 잡힌바 된 그대로 바울 쪽에서 자신을 붙잡고 있는 주님을 붙잡으려고 나아가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향해 달려감에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 낙심하게 하고 좌절케 하는 모든 요소가 무엇입니까? 물론 성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이 땅의 모든 요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록자가 말하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에서, 특별히 히브리서 기록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무거운 것이란, 고난과 박해를 통해 오는 낙심과 좌절로 인하여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당시나 오늘이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위대성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해낼 수 없는 무엇을 했다면 그 사람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위대하다고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스스로 고난을 이겨나가고 큰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대한 인물로 보고 그들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들이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좇았다고 말씀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약속을 드러내는 일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가를 보고 자신도 다른 사람이 썼던 방법을 동원해서 그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를 자신도 만들어 내려고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기도를 동원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주일을 잘 지키며,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는 것으로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시작이나 그 방법에서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것조차도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게 하실 뿐입니다. 거기에 전적으로 붙잡힌 바 되고 사로잡혀서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고백되어지는 자가 성도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이란 꼼짝할 수 없는 주님의 일하심 안에서 고난과 죽음의 상황으로 던져진 상태가 믿음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은 우리가 편안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증거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에 비로소 믿음은 분명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믿음의 증거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허공에 뜬구름 잡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 아니라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받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참으신 분을 생각하고 있습니까?(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