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1강
이삭, 야곱, 요셉
히브리서 11:20-22
저희 식구는 이번 설날에 본가인 김해에 다녀왔습니다. 4박 5일 동안 집에 가서 윷놀이도 하고 가족끼리 지내다 왔습니다. 재미로 돈 몇 푼을 걸고 윷놀이를 하다 보니 그것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몇 푼 안 되는 돈 따려고 목에 핏대를 올리며 설명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역시 인간은 할 수 없나 봅니다. 참으로 별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늘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조그만 것에 연연하여 움직이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약속에 이끌림을 받아 살았던 자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믿음으로 장차 될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지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이삭이 흔히들 생각하는 그런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습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이삭이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에 의해 축복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7:1-3에 의하면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야곱이 형의 옷을 입고 요리한 음식을 들고 들어가서 아버지 이삭에게 에서가 왔다고 속이고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삭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마 감각으로 에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자신이 에서라고 하였기에 이삭은 야곱이 가져온 별미를 먹고 야곱을 축복하였습니다.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7-29).
이 땅에서 복을 받기를 원한다는 그런 축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복이 장자를 통해 계속 이루어질 것을 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그대로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하고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아브라함 언약 그대로 이삭을 통해 이제 이삭의 장자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축복하기를 마치자 에서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사냥한 것으로 요리를 하여 아버지께 드리며 축복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삭은 심히 놀라 떨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27:33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한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장자에 대한 언약의 복을 빈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심히 놀라며 떨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앞에 것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에서에게 다시 하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삭의 행동과 말을 보면 다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한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의 복을 이루실 것을 선언하시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자신의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야곱에게 축복하게 된 것을 번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를 향해서 다시 장자의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창 27:39,40)고 합니다. 결국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복을 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언약을 이루가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복이란 우리 입장에서 어떻게 편하고 좋으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대로 실행하시는 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리브가에게 계시를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난 후에 그제야 예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삭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게 된 것을 단순히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일을 다시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일하신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히브리서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행한 그것이 믿음으로 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삭 자신이 어쩔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삭이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했으나 야곱에게 축복하게 된 그것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삭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계시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이삭은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결국 에서가 아닌 야곱이 장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에서와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야곱과 에서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 장자권을 쟁취하려고 하였던 자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에서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야곱은 편하게 대접받으며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종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종으로 살면서도 야곱은 자신이 장자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고자 하는 야망 때문에 삼촌 라반을 속이면서 재물을 늘려나갔습니다. 그러던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모은 재물이 소용이 없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야곱은 야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환도뼈를 맞아 남은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것이 한 순간 무너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사람을 상대하여 속이는 것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따내려고 했던 야곱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거기에 새로운 사람 이스라엘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인간 야곱의 실패를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에게 지팡이란 그의 평생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창세기 47:31에 의하면 야곱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였다고 되어있지만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21절)라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서 기록자가 야곱의 실패를 전제한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쟁취하려고 했던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만나 그 아들을 축복하면서 오른손을 장자에게, 왼손을 차자에게 올리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른손을 차자에게 왼손을 장자에게 올려서 축복하였습니다. 그것도 자리를 바꾸어 앉도록 해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어긋나게 하여 축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이제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에 그것을 자녀들에게 또한 요셉에게 손을 어긋나게 축복하는 것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계시의 말씀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야곱은 앞으로 오실 언약의 성취자가 큰 자로서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즉 야곱이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면서 손을 어긋나게 하여 축복한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언약의 성취자가 어떤 분이시며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믿음으로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에 약속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일로 축복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 언약 안에서 요셉 역시 야곱이 바라보았던 그것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오늘 본문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에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죽어서 장사지낼 때에 가나안 땅에까지 가서 묻었습니다.
요셉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애굽 땅에 묻히지 않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해골을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3:19에 의하면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그리고 여호수아 24:3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 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고 하여 요셉이 약속의 땅에 묻혀 그 후손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보았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약속을 바라본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이 죄를 정하게 할 수 있고 또한 그 피에 의해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 요셉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셔서 그 약속을 가지고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히브리서 기록자가 믿음으로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그 메시야의 약속에 이끌려 살았듯이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께 이끌려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12:2에 가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주이십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끌림 받으며 그분에 의해 살아지는 삶을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큰 자이신 예수님께서 작은 자로 오셔서 작은 자를 섬기시는 이 놀라운 언약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 말씀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큰 자이신 예수님이 믿음으로 작은 자를 섬기며 사셨습니다. 인간 세계는 모두 큰 자가 되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작은 자가 되어 섬기려고 하기보다 큰 자로서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모든 성도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만 복음을 전할뿐입니다. 말로만 하는 복음은 마귀도 얼마든지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삶 안에는 내가, 또는 우리가 자리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자리차지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말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폼나게 드리고 기도를 오래하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곳에서 드러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물질을 무조건 많이 교회에 내어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 믿는 자의 삶이 아닙니다. 복음은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 것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헌금을 많이 하는 것으로 성도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물질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헌금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배 잘 드리는 것으로 예수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성성수 잘하는 것으로 예수 믿는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그분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모이는 모임을 거룩하게 생각해서 직장의 일을 멈추고 성도들이 모이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어 있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신앙의 열심히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십자가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깝게 생각된다는 것은 주님보다 세상의 것이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주님보다 세상의 것이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중에 순간순간 십자가가 크게 보이고 주님이 내게 책망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가 더 크게 보일 뿐입니다. 자신만 크고 다른 사람이 작게 보이는 것은 죄악의 본성입니다. 죄악의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큰 자로서 작은 자를 섬기시는 주님의 모습이 늘 눈에 아른거리고 주님이 보이기 때문에 큰 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작은 자, 어린 자로서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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