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0강
죽은 자 가운데서
히브리서 11:17-19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비유들은 잃어버린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비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 등의 맨 마지막 설명을 보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것이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눅 15:7,10). 특히 마지막 탕자의 비유에서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24절)고 했고, 32절에서도 보면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가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부르신 자기 백성들을 두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일로 말미암아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보여주시고 확인시켜 주셨는지 오늘 읽은 히브리서 본문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았을 때에 믿음으로 독생자 이삭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2장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면 빠뜨리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에 대하여 말하면 항상 ‘하나님! 아브라함은 독생자 이삭도 바쳤는데 나는 무엇을 바칠까요?’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치라고 말씀하시기 위하여 이러한 본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받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7:24,25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지 하나님이 뭔가 부족해서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고자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오해를 많이 합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않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시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니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아보려고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거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이방 제사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의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계시를 주시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을 확고히 하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분명히 확인시키고자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하시며 계속 약속을 보여주시며 확인시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자기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후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도 사라의 몸을 통해서 날 자가 후손이라고 말씀하시며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을 할례로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산까지 아브라함을 인도하시고 이삭을 제물로 하는 번제를 드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당도하여서도 상당히 고민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등 가운데서 이삭을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심사숙고했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할 때나 성경공부 할 때에 분위기를 고조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실감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2:5에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성경에는 그 표현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면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말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번제의 제물로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번제할 어린양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삭에게 이렇게 답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아브라함은 막무가내로 밀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배째라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이끌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모리아 산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 자신이 이미 지시하신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이끄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이삭을 아브라함이 있던 그 장소에서 바치라고 하시지 않고 모리아 산에까지 가서 번제를 드리도록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그리고 모리아 산이라는 장소를 지정하셔서 주실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에서는 모리아 산에 대하여 말할 때에 ‘내가(하나님이) 지시하는 한 산’이라고 세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창 22:2,3,9). 그리고는 창세기 22:14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고 ‘여호와의 산’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번제의 제물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수양을 제물로 하여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을 번제로 드리게 됩니다. 그 뜻은 이삭이라도 진정한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삭도 약속의 인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대신하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3: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그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헤롯 성전을 보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요 2:19). 그러자 유대인들이 46년 동안 지어진 성전을 어떻게 사흘만에 일으킨다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건물을 새로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2:21).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시비 거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6,7).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제사가 전혀 필요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전보다 더 큰이가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으로 구약에서 성전이 보여주고자 했던 그 모든 의미가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약속이 성취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것이 곧 제사라는 의미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성전으로, 아니 성전보다 더 크신 분으로 성전의 완성으로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진정한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삭이 메시야가 아니라 약속의 아들로서 오실 분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아들은 성전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은 인간의 요청이나 노력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는 제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모리아 산까지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을 준비하시어 앞으로 오실 진짜 약속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죄인들의 요청이나 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홀로 친히 준비하신 속죄 사역이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데 대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바로 이러한 계시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이제까지 이끌어 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의 완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여러 모양으로 이끌어 오셨고 마침내 모리아 산으로 부르셔서 이삭과 모리아 산에 대한 계시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로 주신 이삭을 통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아브라함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이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드렸는데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13절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당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표현된 말씀과 상충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서로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13절에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약속의 성취,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드리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모리아 산까지 이르게 된 이런 점에서 19절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좇아 이삭을 드리게 된 그것은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약속 안에서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이런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 가운데서 부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르시는 것이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로마서 4장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6,17).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에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모든 정당성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죄악이 극도에 이르렀고 결국 하나님까지 미워한다는 것이 철저히 증명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십자가를 오히려 약속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신 것이었습니다. 그 죄인들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는 십자가로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시험했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얼마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믿음의 순종을 보여주었는가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되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보여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약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도록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동일하게 오늘도 약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고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며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라면 더 이상 세상의 것에 미련을 갖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자라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자기 백성들에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우리가 보는 것은 조직과 체계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봅니다. 목사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봅니다. 예배당 건물이 얼마나 화려하게 잘 지었는가를 봅니다. 그래서 뭐가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라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도 역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분이 다시 살아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죽은 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시체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무덤을 지키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신 분과 함께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일하시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 계신 분과 함께 거하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게 된 것입니다. 죽었다가 산 자는 더 이상 죽은 것을 바라보고 죽은 것에 매이는 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이 땅의 외형적인 것에 매여 있습니다. 죽은 것을 좇아 일생을 살고자 합니다. 죽은 것과 시체를 모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라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받은 새로운 생명이 있기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기쁨으로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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