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39.히브리서 11:13-16 하늘에 있는 본향

불편한 진리 2014. 9. 15. 16:44

히브리서 39

하늘에 있는 본향

히브리서 11:13-16


새로운 밀레니엄이라고 떠들던 2000년도가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2000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2001년이 되니까 새로운 밀레니엄의 첫 해라고 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인간은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질 있고 느낄 수 있도록 세상과 세상의 것에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별로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도 세상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새로운 밀레니엄, 새로운 해의 11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는 목회적 시도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송구영신예배라는 상품을 비롯해서 새해의 첫 날을 맞이하는 행사나 프로그램들을 계발하고 그 행사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신앙이 한 단계 성숙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많은 사람들이 또 오해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행해지는 행사나 프로그램 자체를 부정하려는 마음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제가 평소에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행사, 프로그램, 교회의 일들을 모조리 다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조건 나쁘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는 교회들을 다 잘못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을 하든지 그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좀 더 한 단계 나은 성숙한 신앙으로 만들고자 하는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이 한 차원 높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반문하기를 그러면 무의미한 것을 왜 해야 합니까?’라고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시간에 맞추어 살아야 하고 세상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세계를 아는 존재입니다. 이 땅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하늘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 없고 무의미하다고 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내 방식과 내 고집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세상과 타협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살고 그들에게 동화되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질이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방식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좇아 산다는 것은 하늘의 것이 실상임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고 하늘나라를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과 더불어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실제 삶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늘나라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돌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것이 모두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가 된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 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의 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오래 된 우리나라 가요 중에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에서는 인생이 나그네길이기 때문에 세상에 정을 주지말고 강물이 흘러가듯이 그렇게 살자고 합니다. 목적지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와 같은 성도의 삶은 그 목적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나그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성도의 삶은 나그네 삶으로 끝나는 것이 본향이 하늘에 있고 그 하늘에 하나님께서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1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 믿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은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우리가 천국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믿음을 따라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나열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이라는 말씀을 붙여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된 인물들 중에서 에녹같이 죽지 않고 산 채로 옮기워진 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한 말씀은 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산 채로 옮기워진 에녹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서는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죽은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다른 세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죽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따라 죽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구약의 인물로서 그들이 무엇을 바라보았는가 하는 것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13,14). 여기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약속의 실체는 받지 못했다, 또는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약속을 받은 자들은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실제로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서나마 바라보고 그 약속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지배를 받으며 약속만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현실적인 것이었으므로 그 약속의 성취가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이미 확고부동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였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나열하고 있는 모든 믿음의 조상들은 다 그렇게 약속의 지배를 받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땅에서는 비록 외국인과 같은 삶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지배를 받는 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이 땅이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통해 늘 확인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늘에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늘 확인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어쩌면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고향의 사람들로부터 다시 돌아왔다고 환영을 받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자체가 본향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본향이란 하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생활 방식이 다른 외국에 나가보면 비로소 편하게 살던 자신의 고향이 그리운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살았던 본국을 사랑하게 되고 향수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에 거주하는 자는 자기 고유의 환경이 아닌 풍토 속에서 불안정감과 이질감을 느끼는 가운데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이 살던 고향을 등졌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의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도록 말씀하셨고 또한 그 땅에서 주신 후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땅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의 본향이 훨씬 더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결단을 가지고 약속을 좇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늘 자신이 발붙이고 살고자 하는 이 땅에서 떠나도록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본향을 바라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살던 이 땅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혈육으로 사는 아브라함에게는 가능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약속을 좇아 믿음으로 사는 아브라함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자신이 기록한 10:38,39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뒤로 나아가는 자가 아니라 앞으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지배를 받고 약속을 바라보며 약속을 위해 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6절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들에게 성취된 약속인 십자가를 주시고 그것을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되기를 기뻐하시며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믿음을 따라 죽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취로 주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온전한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믿음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령님의 지배를 받게 하심으로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늘 그것을 목표로 사는 자여야 합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약속에 의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죽었다는 뜻입니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넓고 편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시민권을 두었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죽은 자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3:1-4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은 가짜이고 하늘의 진짜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향이라고 선포하도록 하늘의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세계를 선포하고 가르쳐주어야 할 자라면 먼저 하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삶을 보여준다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상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모조리 다 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목표가 오직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