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3강
믿음과 시험
히브리서 11:23-29
우리는 지난 시간에 모세가 출생하여 부모에 의해 숨겨 키워진 일이 믿음으로 된 일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범상치 않음을 인하여 숨겨 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인가 큰일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좇아 살았던 것입니다. 약속의 아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사로잡아 이끌고 있었기에 모세라는 아이를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세가 장성하여 바로의 왕궁을 거부하고 미디안 광야로 가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이 모든 일들이 믿음으로 된 일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출애굽기를 통해 우리가 아는 바는 모세가 사람을 쳐 죽인 사실이 들통 났기에 바로가 무서워 미디안 광야로 도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록자가 보는 시각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바로의 모든 것들을 거부하게 만드신 사건입니다.
이 모두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무엇인가 될 수 있다고 여기면서 하는 자기 최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순종하자는 맹종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배경이 되어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모세가 받은 모든 고난을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26절)이라고 했고 또한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27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모세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스스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끌림을 좇아 약속을 이루는 도구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록자가 믿음으로 살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운 일들이나 고난을 모세가 참을 수 있었다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세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 같이 하여 미디안 광야의 어려움을 참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이런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과 내가 일하는 것을 혼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에 대하여 구분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하시는 것이고, 내 쪽에서 무엇인가 확실하게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과가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편에서 무엇인가 자꾸 하려고 설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일하게 하실 때에 하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시지만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한 반대로 복음을 안다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일은 주님이 완성하셨고 또한 지금도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짓는 것도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죄기 때문에 어차피 죄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엇인가 잘하려고 하는 그것 자체도 죄라고 생각해서 아예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어떤 공동체에서 지켜져야 할 아주 기본적인 상식이나 도덕적인 습관까지도 무조건 무시하면서도 자신은 복음 안에서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복음이란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의를 완성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대속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만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오늘도 주님이 일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나태함과 게으름을 합리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죄짓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죄인)의 행위 자체를 믿음과 대치되는 것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행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에 조그만 행위라도 기피하도록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이든지 못하고, 하지 않도록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주님을 위해서 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우리의 행위 속에 죄를 발견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속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 보여주시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구약의 인물들이 모두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형편없는 존재이고 우리와 똑같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사로잡히고 그 약속에 의해 도구로 쓰임 받고 있을 때에 인간의 악함과 대비되어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좇아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입니다. 29절에 보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믿음으로 건넜습니다. 믿음으로 건넜기 때문에 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진 것입니까? 앞에서 모세에 대하여 살펴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결코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당한 상황과 그들이 한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0-12).
단순히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만 후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종노릇을 하더라도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말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죽는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더라도 살아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믿음 있는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건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면서도 믿음을 발휘한 것으로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한 사람이라도 믿음이 약해졌거나 없었다면 홍해가 다시 합쳐져서 바다에 이스라엘 전체가 몰사해야 되었습니까? 홍해를 건너는 내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믿음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그러한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에 대한 것도 성경적 입장에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애굽 전역에 내려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모든 집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피를 바른 집은 장자를 죽이는 하나님의 사자가 넘어갔다고 출애굽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히브리서 본문에서는 유월절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는데 모세가 믿음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도구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증거하는 삶이 모세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믿음으로 유월절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모세가 믿음으로 유월절 예식을 정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가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장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못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르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구원,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넜다고 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린양의 피를 바르도록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약속이 하나님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 받는다는 것은 애굽에서의 빠져나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건짐 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몰사하지 않고 건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것으로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홍해 앞에서도 죽지 않고 홍해를 건넜다는 것으로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려줌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삶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 받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전제하고 있고, 무엇을 좇아 살게 하시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전제하고 있고, 그 희생의 피에 의해 앞으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좇아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 하나님의 약속만을 위해 살뿐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하던 죄의 습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어린양의 희생에 의해 건짐 받고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이제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희생을 드러내고 증거하기 위해 살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29절에서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생명의 길이었던 홍해가 애굽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같은 길인데 왜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길로 되어 나타납니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히브리서 기록자는 바로 ‘믿음’과 ‘시험’이라는 것으로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좇아 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늘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또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이렇게 사망과 생명을 동시에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그러므로 ‘저(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 반면 불신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벧전 2:6-8, 사 28:16, 8:14,15).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분을 살아 계신 분으로 인정하고, 십자가 희생으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분으로서 지금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늘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좇아 사는 성도는 이 세계가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약속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항상 자신에게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으면 불만을 터뜨립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이것저것 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그러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이 믿음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기를 밥먹듯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 존재할 뿐입니다. 십일조도 축복을 주시는 조건부가 붙습니다. 기도 생활을 하는 것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조건이 반드시 따라옵니다. 예배도 앞으로 한 주간 우환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드려지는 예배가 됩니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상급이 남들보다 많아야 한다는 보장성이 확실해야 열심을 냅니다. 송구영신 예배라는 것을 통해 일년 전체의 액땜을 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감이 있어야 헌금을 듬뿍 바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조건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이끌려 할 수 없이 말씀을 좇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주님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할 수 없이 해야 된다고 하니까 짜증스럽게 이끌려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주님께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기쁨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애초에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주의 영이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가져도 되고 안 가져도 되는 액세서리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히 11:6). 믿음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가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는 믿음이란 소용이 없다는 것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과 그분을 위해 살아지는 삶이 나온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인줄 알고 감사합시다. 나머지 인생이 하나님께서 덤으로 베풀어주신 것으로 인정하고 일생을 믿음을 좇아 살기로 결심합시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오직 약속만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살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하며 살아지는 삶이기를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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