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37강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히브리서 11:8-10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의를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고, 무엇인가 하려고 설쳐대는 한국교회의 잘못된 점들을 비판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표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17).
죽은 믿음은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믿음이 분명히 어떤 작용을 하며 그 믿음의 작용에 의해 반드시 어떤 증거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형제를 위해 희생하는 행함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로만 형제와 함께 하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생각할 때에 행위를 강조한다는 것 때문에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을 특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표현되는 믿음과는 다른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아주 가치 없는 책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또는 다른 책들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믿음이라는 말이나 야고보서에서 사용되는 믿음이란 같은 의미입니다. 다만 그 강조와 표현에 있어서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라는 말을 풀어서 행위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말에는 순종 또는 행함이라는 말이 포함된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우리가 믿음이라는 말을 이해할 때에 내 안에서 만들어진 신뢰나 동의 또는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신 그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절대적인 의미라고 상고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나열되고 있는 믿음의 조상들은 전부 그들의 믿음을 설명함으로 그들이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든지 또는 그들은 어렵고 못 믿을 상황인데도 열심히 믿고 따랐다는 식으로 그들의 잘남을 드러내고 있는 기록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기록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가 구약의 인물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는 기록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오실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모든 의를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그 의를 미리 덧입혀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들이 믿음의 증거로 드러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도 구약 시대에 있었던 믿음의 조상을 좇아가라는 뜻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그들을 붙잡고 있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았는가 하는 그 증거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바로 이러한 믿음의 증거들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자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혀 있다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된 믿음의 조상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영원히 좇아가지 못할 믿음의 위인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우리가 좇아가야 할 믿음의 위인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일하신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오늘날도 자기 백성들을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말 기쁨으로 순종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습니까? 여호수아 24:2 이하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수 24:2,3).
아브라함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자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우상의 도시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4:3에서 아브라함이 자원에서 갈대아 우르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위대성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이끌었던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사로잡고 인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그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없었다면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아브라함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끌림에 의해 따라간 것뿐입니다.
그것을 창세기 12:5에서 ‘마침내’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그러므로 여기서 ‘마침내’ 라는 말은 아브라함 편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처음부터 부르시고 인도해서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하신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도 약속의 땅을 지키고 있었습니까? 본문 말씀을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약속의 땅으로 믿고 그 땅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창세기의 기록에서 보는 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굳게 지키고 있으면서 그 땅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10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생기자 곧 그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있었다면 애굽의 바로 앞에 가서도 당당해야 안되겠습니까? 그런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는 비굴함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본문 9절을 통해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지켰다는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믿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우거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금도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셔서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하셔서 거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아브라함이 한 일이라고는 약속의 땅에 기근이 오자 애굽으로 내려갔고 또한 바로 왕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이라고는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6,7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어서 약속의 땅을 주며 업을 삼게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발휘할 믿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매이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10절)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된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후손들을 주시겠다는 것을 믿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된 것 자체가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린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0:32-34에 보면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위해 자신의 산업이 다 빼앗기는 상황을 당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고난의 싸움을 계속 싸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영구한 산업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의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늘 성소에 나아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언약의 피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리신 것은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십자가로 오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안에 주어졌기에 우리는 비로소 하늘의 산업이 영구한 산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만 바라보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전혀 알지 못하고 가보지 못한 그 땅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받아들이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하늘의 영구한 산업을 이 땅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증거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붙잡고 있습니까? 믿음이 아브라함을 사로잡고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도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즉 이방 땅의 나그네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자신의 소유로 땅 한 평 가지지 못했습니다. 나그네였기에 사라를 매장할 한 구획의 땅을 겨우 매입할 정도였습니다(창 23:16). 비록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땅을 가지지 못하고 나그네와 같은 존재로 살았지만 하늘의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늘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위대하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잘 순종했느냐 하는 영웅담도 아닙니다. 앞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루실 십자가의 은혜를 미리 앞당겨 이미 아브라함에게 베풀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주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오늘도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임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좇아 살게 하고자 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그저 귀찮은 존재로 하나님의 말씀에 늘 거부하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브라함을 통해 볼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에게 주어진 믿음에 의한 신앙생활은 허공에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막연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지 않는 것이 자랑이고 무엇이든지 인간이 만들어낸 행위를 부정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만이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즉 죄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을 부정하자는 차원이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그 일 조차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순종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향해 이웃을 향해 구체적으로 십자가를 드러내는 모습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식으로 팔짱을 끼고 좌정하고 있는 모습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의 영이 사로잡고 있어야 아벨과 같이, 에녹과 같이, 노아와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믿음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순종하며 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날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죽은 믿음을 가지고 믿음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그 죽은 믿음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인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믿음에 의한 순종, 십자가에 죽는 삶은 도출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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