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36.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불편한 진리 2014. 9. 15. 16:34

히브리서 36

믿음으로 노아는

히브리서 11:7


어릴 때부터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노아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도 노아의 홍수 사건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노아가 인내하면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노아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방주를 만드는 심정으로 살아가자고 권면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런 이름들을 거론하면 도무지 죽자고 따라가도 그들의 믿음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을 많이 실감합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소위 말하는 믿음의 위인들입니다. 매일 마음 속으로 다짐하는 것은 노아와 같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노아와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을 보는 관점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관점은 어떤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 인물을 좇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셨는가 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의 훌륭한 인물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약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같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바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는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여 쓰신 도구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성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고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관점으로 보지 못한다면 성경을 아무리 100200독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히브리서 11장을 계속해서 상고해 나가고 있습니다. 11장 초두에서부터 우리의 관점은 11장에 거론된 구약의 인물들이 얼마나 훌륭한 믿음을 가졌는가 하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그들이 어떻게 활용 당했는가 하는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노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도 노아 홍수에 대한 사건을 과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풀어가려고 하지 하나님의 언약적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노아 홍수 사건을 들먹이면, 방주의 크기가 얼마인데 거기에 모든 동물들이 어떻게 다 들어갈 수 있었는가? 지금 터키의 아라라트 산 정상의 눈 속에는 방주의 조각들이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어지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안 믿을 것입니까? 한국창조과학회라는 모임에서도 하고 있는 일들이 이런 일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라라트 산 정상의 방주 조각을 파 온다 해도 그 조각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말 한마디 써 있지 않습니다. 과학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증명된다고 해서 안 믿을 자가 믿게 되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지식적인 것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되는 일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한국교회 안에도 과학만능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무조건 의심하고자 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와 논리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신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과학이 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도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가설 위에 과학적 사고를 세워나간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허구성을 전제하고 있는 학문으로 성경을 풀어나가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은 과학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으니라”(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5:28-9:29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앞에서 언급한 아벨과 에녹에 대한 기록에 비해 창세기의 기록이 비교적 많은 편입니다. 어쩌면 기록이 비교적 많다는 것 때문에 노아에 대한 오해와 여러 가지 추측들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노아의 출생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5:28-29). 아벨에 대한 기록을 우리가 상고할 때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은 뱀을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여인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밟고 반드시 승리하실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계속 기다리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창세기 4:25에도 보면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라고 했습니다.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아벨이 자신들을 구원할 여인의 후손으로 기대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셋을 낳은 후에 다시 아벨을 대신한 다른 후손으로 기대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는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고 그것이 창세기 5장에서는 라멕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라멕은 아들을 낳았을 때에 노아라고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노아란 이름의 뜻은 안식’, ‘안위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는 아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을 가져다 줄 아들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있는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성장하였을 때에 죄악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을 보고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을 비롯하여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다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 노아는 의인이었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죄악 가운데서 살고 있었는데 유독 노아 혼자만 의로울 수 있었습니까? 그 원인을 8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노아가 의로운 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경건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가 의로운 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란 도덕적으로 결점이 없었다거나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의인이요 완전한 자입니다.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방주를 만들었다고 히브리서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경고로 받았을 때에 단지 경고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아야 하는 것은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노아가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경고입니다.

노아가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았다는 것은 말씀하신 하나님이 배후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노아가 경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노아의 지적인 동의나 신뢰가 아니라 노아에게 장래 일을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6:13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심판에 대한 선언을 하시고 노아와 그 식구들이 구원 얻을 수 있는 방주의 제도에 대한 자세한 말씀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창을 내는 것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방주에 대한 제도를 구체적으로 주신 것은 노아가 임의로 만들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방주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노아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믿음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고자 하는 약속 때문에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신 것뿐입니다. 그 결과로 말미암아 노아가 방주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방주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노아의 삶에서 드러난 결과일 뿐입니다. 창세기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에게 임했기 때문이라는 말이고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믿음이 노아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방주를 만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무엇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예비하도록 하였습니까? 보지 못하는 일을 현실로 끌어당겨 인정하도록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선언했습니다. 바로 믿음이란 이런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아로 말미암아 아직 일어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일을 경고로 받았을 때에 보이는 방주를 만든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선물이란 내가 받고 싶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는 자의 입장에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에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6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계를 지으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록자가 노아의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된 것은 노아가 가진 믿음이 훌륭했다는 뜻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가 믿음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방주를 만드는 일을 해 낼 수 없는 것과 같이 믿음에 붙잡히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십자가에서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언약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 피에 의해 죄인이 하늘 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다는 것은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과 같은 믿음의 증거들이 우리에게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믿음의 증거를 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장악되어 있고 말씀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그 증거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그 믿음의 증거들은 곧 우리의 삶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만들고 그 집을 구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정죄하는 의의 증거자로 살았다고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7-39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재림과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가 노아의 때와 같은 상황이라면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노아의 때와 같은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비로소 의인으로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 수 있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비로소 의인으로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가 어떻게 베풀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내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없이 노아의 때와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어느 날 문득 내게 믿음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인줄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되시고 말씀이 되셔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노아에 대하여 한 마디로 언급하기를 의를 전파하는 삶이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오늘 우리는 의의 전파자임과 동시에 세상의 죄에 대하여 정죄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은 나를 전파하고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 역시 죄로 말미암아 죄를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 자신부터 정죄할 줄 알고 죄에 대하여 민감한 상태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알 때에 우리는 세상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선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 그분이 그렇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16:8).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방주와 같은 증거란 바로 의를 증거하는 이러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알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의의 후사가 되었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면서 사는 모습이 된 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만 증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아픔이요 고통일 수 있습니다. 아니 분명히 고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분명히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 눈 돌리지 않고 주님께 고정시켜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