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4강
믿음으로 아벨은
히브리서 11:4
구속사성경연구회라는 홈페이지에 몇몇 목회자들이 주일마다 전했던 말씀강론을 올립니다. 또 우리 교회는 주성카페라는 홈페이지에 말씀지 내용이 그대로 파일로 올려집니다. 인터넷이 그렇듯이 언제나 전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터넷에 접속하면 말씀강론이나 성경공부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 매 주일 말씀강론이나 성경공부 내용이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인터넷에 저의 글을 공개한다는 것으로 사람들이 저를 대단하게 보고 믿음이 좋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저의 입장은 그러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저는 글을 그렇게 공개해야 할 만큼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글을 공개할 만하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글의 내용이 뛰어나거나 볼만하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제가 알고 깨달은 대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신앙 고백일 뿐입니다. 글이란 잘 썼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글은 그 사람의 부족과 허물, 못남이 그대로 묻어나고 드러난다고 생각하지 글을 통해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 혹은 얼마나 똑똑한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혹시 필요하시다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우리의 못난 모습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을 드러내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글 자체에 매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 내용을 보기보다 얼마나 글을 짜임새 있고 논리적으로 잘 썼는가 하는 것을 봅니다. 한 마디로 저는 믿음이 좋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글을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믿음이 그렇게 만든 것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에 대한 문제도 이런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복음을 전하면 복음 자체에 관심가지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전도를 잘하느냐 혹은 기도를 어떻게 그렇게 오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외적인 종교 생활에 매여 버리는 것입니다. 주성교회에 매이고, 예배 의식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믿음이 들어와 있는 증거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어떻게 이렇게 아벨의 제사가 믿음으로 드려진 제사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창세기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아벨에 대한 기사는 창세기 4:1-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창세기 본문도 아벨에 대한 기록이 중심이 아니라 가인에 대한 기록이 중심이 된 것 같아 보입니다. 출생에 관한 간단한 언급 외에 형 가인의 손에 의해 죽는 이야기뿐입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두 사람은 제물을 여호와께 드렸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가인은 격분하고 시기한 나머지 아벨을 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1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표현은 문자적인 의미로서는 ‘여호와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가인을 낳고 나서 가인을 보고 여호와를 얻었다고 표현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대의 내용이 바로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을 낳고서는 이 아이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이런 기대를 가지게 된 것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되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따라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곧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통해 계속적으로 공급되어지고 있는 생명, 즉 생명 안에서 살고 있었던 상태를 거부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는 결별된 새로운 나라, 그것이 인간이 원했던 나라였습니다. 가인을 통해 드러난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서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이라는 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에녹이란 자기 아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따서 자기가 쌓은 성의 이름으로 붙였다는 것은 자기 소유의 왕국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의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상태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의 본능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켜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가인과 같은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 하나님은 인간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약을 주시게 됩니다. 뱀을 저주하는 말씀 속에 약속을 포함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기서 ‘너’라고 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뱀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탄이요 마귀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참고 계 12:9). 하나님은 한낱 동물인 뱀을 상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고 또한 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금 이 순간부터 마귀와 하와가 원수 관계가 된 상태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된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되어 궁극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뱀의 후손이란 뱀이 새끼를 낳아 연속된 뱀의 자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귀에게 후손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하여 그들이 마귀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뱀의 후손이란 마귀의 후손이라는 뜻이 아니라 마귀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께 속한 자를 여자의 후손으로, 마귀에게 속한 자를 뱀의 후손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건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인간과 마귀가 서로 끝없는 원수 관계가 되는 상태로 두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서 마귀의 머리를 밟고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는 말씀 속에 포함하여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아담은 알아들었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언젠가 여자의 후손이 와서 마귀를 온전히 멸하고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였기에 여자를 하와라고 명명하고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었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창 3:20).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가인을 낳았을 때에 혹시 이 아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내 아담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들을 낳았을 때에 헛되다는 의미로 아벨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즉 아담이 실망했다는 것을 이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벨이 진정한 믿음의 계열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단순한 제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약속된 하나님의 계열(여자의 후손)을 단절시키기 위한 마귀의 획책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기에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기에 양의 첫 새끼를 잡아 그 기름과 함께 드렸습니다. 이것을 창세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4,5).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것은 아벨과 가인의 제물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표현함으로 아벨이 어떤 마음 상태로 드려진 제물인가를 보셨고 가인이 어떤 마음 상태에서 제물을 드렸는가 하는 것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제물을 무엇으로 드렸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벨의 제물이 양의 첫 새끼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하셨고 가인의 제물이 땅의 소산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아벨과 가인의 마음 상태였습니다. 어떤 마음 상태에서 나온 제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아벨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아벨이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곧 자기 믿음에 의해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벨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자기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공로가 되는 믿음이란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벨은 결국 자기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지난 주일에 상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벨이 어떻게 신뢰했는가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믿음입니다. 결국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약속으로 아벨을 사로잡고 계셨기 때문에 아벨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아벨의 공로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희생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사로잡고 계신 결과로 아벨은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8에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그대로 아벨은 믿음으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인과 아벨, 그 중에서 누가 의로우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를 얼마나 깔끔하고 멋지게 드리느냐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 행위를 가지고 얼마나 잘하느냐 하는 것으로 보시는 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창세기 4장에서 애초부터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찬양도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기독교 서점에 갔을 때에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어떻게 설교하는가 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목회자의 설교집을 몇 개 서점에 서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설교집들을 보고 너무도 놀랐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기에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어 와서 지붕을 뜯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 사건을 가지고 설교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인즉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네 사람의 믿음에 예수님이 감동하셔서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 지극한 정성을 드리고 끈질긴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극한 정성으로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아주 무시하며 참으로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설교입니다. 한 두 개의 설교를 보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피의 복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성으로 드리면 우리의 헌금, 예배, 기도, 찬양, 봉사를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예쁘게 봐주실 것이라는 발상은 무속종교에서나 있는 교리입니다. 정한수를 떠놓고 무조건 빌면 어떤 신이든지 있다면 그 정성에 감동되어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은 성경에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전해진 무속신앙이 기독교 신앙으로 용어만 바꾸고 외형적인 형식만 기독교화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결코 만물은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여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다스림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피조 세계가 죄악 가운데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초래하게 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 세계가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세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약속을 주시고 계속해서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과 만나시며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침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1:1,2).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에, 생명에 합류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아니고서는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회복된 상태가 바로 아벨과 같이 약속에 의한 제사를 드리게 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상태입니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는 말씀은 아벨이 아직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합니까? 믿음으로, 즉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이 가인에 의해 죽었지만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믿으라고 말입니다.
외적인 종교 의식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찾아나가고 그것으로 자신의 경건을 쌓으며 구원 얻는 근거가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배, 기도, 헌금, 봉사 그 모든 것들은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나와지고 증거물일 뿐입니다. 제가 인터넷에 말씀강론과 성경공부 내용을 다 공개하는 것은 믿음이 좋아서도 아니고 문장력이 좋기 때문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나를 어떻게 사로잡고 있는가 하는 증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의 증거물을 붙잡고 천국가려고 하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인 것을 오늘도 고백하면서 삽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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