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35.사무엘상 31:1-13 사울 왕의 죽음

불편한 진리 2014. 9. 6. 20:21


사무엘상 31:1-13

사울 왕의 죽음

 

다윗의 군대가 아말렉을 추격하여 승리를 거둔 반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참패였다. 사울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의 군대는 블레셋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하다가 길보아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거기에는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도 포함된다.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 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7)라는 말씀은 이 전쟁이 얼마나 큰 전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하여 다윗이 아말렉을 진멸함으로 언약의 왕으로 부각되는 반면 사울은 왕의 직무를 죽음으로 마무리하고 그 가문도 몰락하는 결과를 보여 준다.

본 장은 이제 사울 왕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사울은 블레셋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자신의 병기를 들고 따르는 부하에게 칼로 죽여 달라고 명령했다.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기 싫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였다(4). 그러나 사울 왕의 부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두려워 그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결국 사울은 스스로 칼을 빼서 그 위에 엎드러져 죽었다. 성경은 이렇게 언급한다 :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6).

본문 강론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공개된 설교들을 찾아보았는데 대부분의 설교들에서 사울의 죽음이 비참했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 성도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고 적용하였다. 그러면 비참하게 죽는다는 것에 대한 정의도 생각해야 하겠지만 먼저 비참하게 죽는다는 것이 저주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참하게 죽은 걸로 말하자면 예수님만큼 비참한 죽음을 죽은 자가 있겠는가? 로마 병사들로부터 엄청난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을 당하신 후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또한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다 알 수는 없지만 비참한 결말을 맺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죽음에서도 돌에 맞는 비참함이 있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소관이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진다. 특히 사람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내는 가장 극명한 사건이며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은 결과를 보여 주는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현상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과 연관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사울이 비참한 죽음을 죽었다고 한다면 그 비참함이란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없이 살았다는 자체를 가지고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역대상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13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13-14)

 

사울의 죽음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울의 자살을 부추겼다는 뜻도 아니고 자살할 마음을 집어넣으셨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울이 스스로 죽음에 던져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사울의 왕권을 끝내도록 하시고 다윗을 언약의 나라의 왕으로 세우고자 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이란 사람이 원하고 죄인들이 희망하여 세운 왕권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 왕은 결코 언약의 나라에 합당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사울의 죽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울의 범죄란 단순히 우상을 섬겼다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을 무시하며 살았던 사울의 범죄였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왕으로 통치하고 있는 중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시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이 구도가 형성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름 부음을 받음을 통해 보여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그 언약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보여 주신 것이다. 사울은 실패했고 다윗은 성공했다는 것이 아니다.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니까 사울은 언약과는 반대로 자기기 원하는 대로 살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인도하시고 주도하셨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언약을 좇아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사실 사울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을 만날 것이니 그를 왕으로 세우라고 지시하신 결과로 왕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울은 참으로 억울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서 죄인들이 원하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는 결코 존속될 수 없음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사울이 왕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죽지 않을 사람이 아니고 그가 범죄하지 않을 자인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범죄하게 된 것도 아니다. 사울이 범죄한 것은 악한 인간의 본성을 왕의 자리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낸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는 언제나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2-13)

 

전쟁이 마무리되고 그 이튿날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의 죽은 병사들을 확인하고 전리품을 거두기 위해 왔다가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들이 길보아산에서 전사한 것을 확인했다. 블레셋 병사들은 사울 왕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겼다. 그들은 그 시체와 갑옷을 아스다롯 신당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흩어 두어 블레셋의 승리를 자축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있어서 그것은 엄청난 수치였다. 사울 왕의 시체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모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 중에서 용맹한 자 몇 명이 가서 사울 왕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거두어 야베스로 돌아와 화장을 하고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를 지낸 후 7일간 금식을 하였다.

사울의 시체를 불에 태웠다는 것이 특이한 장례식이다. 레위기 20:14에 보면 음행을 행한 자들을 불에 태워죽이라고 하였고 여호수아 7:15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언약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자 아간과 그의 모든 소유를 불사르도록 말씀하셨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비언약적 사고방식으로 왕의 삶을 살았던 사울의 시체를 불살라 언약적 수치를 이방인들에게 당하게 한 모든 것들을 제거하신다는 심판을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은 아닐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범죄함에 대한 자숙과 슬픔을 금식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사무엘상 29-31장은 사울의 통치가 마무리되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참된 왕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사무엘상 전체는 사실 누가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냐 하는 문제를 드러낸다. 그리고 사무엘하에서는 이제 참된 왕 다윗의 왕권이 어떻게 행사되고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사무엘하 강론에 들어가고자 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