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33.사무엘상 29:1-11 위기를 벗어나는 다윗

불편한 진리 2014. 9. 6. 20:17


사무엘상 29:1-11

위기를 벗어나는 다윗

 

사사기를 통해 제기된 왕이 없어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현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비언약적 태도에 대하여 성경은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왕을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그리고 사무엘상 전체에서 기록자는 누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왕인가하는 문제에 대하여 답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울 사무엘의 출생과 성장을 기록하고 그의 사사와 선지자,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보여 준 뒤 사울과 다윗이 등장한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이방 왕들과 같은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고 이어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 후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셔서 사람들이 원하고 택한 왕 사울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 다윗을 대조해 나간다. 사무엘상 후반부에서는 사울이 어떻게 몰락해가며 다윗이 어떻게 점점 왕으로 부상하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다윗은 비록 이방인의 땅 블레셋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들을 수행하고 있었고, 사울은 이스라엘 땅에 살고는 있으나 무당을 찾아 사단의 속임수에 말려들어 오히려 이방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무엘상 29장 이하에서는 그 결말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본장은 28장 초두(1-2)에서 아기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준비하며 다윗에게 동참하기를 요구하였다는 다윗의 딜레마를 잠시 언급하였다가 미뤄둔 결말에 대한 기록이다. 28장을 통해 사울은 이제 완전히 언약의 왕다운 모습과는 반대로 최악의 상태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러면 다윗은 언약의 왕다운 모습으로 가고 있는가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위치에 있게 될 것인가 아닌가? 또한 그 자리에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29장을 읽으면 다윗이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위기를 벗어나도록 만드심으로 언약의 왕의 자리에 이르도록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블레셋의 모든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아벡에 진치고 있을 때 다윗도 그들과 함께 있었고 이스라엘은 이스르엘 샘 곁에 진을 쳤다. 이때 블레셋의 장군들 가운데 몇 사람이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3)라고 말하면서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히브리 사람이란 표현은 강을 건넌 자라는 뜻으로 가나안 땅의 본토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도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기보다 이스라엘에게서 버림을 받아 비천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다윗의 군대는 이스라엘에서 밀려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다윗을 중심으로 모인 무리들이다(삼상 22:2).

이때 아기스는 다윗을 변호하지만 블레셋의 장군들은 사울의 죽은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5)라는 노래를 상기시킨다. 이에 아기스는 자기 신하들을 설득하다가 더 이상 다윗을 전쟁에 참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포기하고 도리어 다윗을 설득한다. 이때 아기스가 한 말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6)라고 말한다. 이는 아기스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다윗에 대한 예우로 다윗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다. 다윗이 믿는 신을 인정할 정도로 다윗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다윗은 오히려 아기스에게 계속적으로 거짓을 말한다.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다윗이다. 그는 어찌하든지 싸움을 피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는 싸우겠다고 하고 정작 싸움을 말리는 사람은 블레셋의 장군들과 아기스이다. 때문에 다윗은 전쟁에 참여하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떠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비록 다윗이 이방인들 속에서 적당히 속이며 지내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가운데 다윗을 언약의 왕으로 세우실 계획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블레셋의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하셨다. 이는 다윗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를 언약의 나라를 위한 왕으로 세우고자 하신 하나님 자신의 언약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다윗을 가장 모르는 아기스가 다윗을 세 번이나 변호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장면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풀어주려고 했던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23:4,14-15,22). 빌라도도 아기스와 같이 전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여 이렇게 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기스는 자신의 왕 자리를 더 굳게 하기 위해 다윗을 이용하고자 하였고 빌라도 역시 자신의 총독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이처럼 언약의 왕 다윗에 대하여, 언약의 성취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알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죄인들의 심성이다.

 

아기스가 다윗을 믿으려고 하듯이 사람은 이렇게 늘 서로를 믿고 싶어 한다. 그것이 학연과 지연, 동년배라는 끈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죄인이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결심이나 각오도 주변 여건과 환경에 의해 얼마든지 포기하고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흔히 교인들끼리 교회에서 사람을 못 믿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사람을 믿었다가 철저히 실망하면서 결국 하는 말이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말이다.

교회는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임이다. 오래 전 길을 가다 어느 큰 교회당 입구에 예수님은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어주니 당신이 정말 훌륭한 존재이니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교회로 오라는 뜻으로 하는 말 같다. 실로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상술에 의한 현수막에 불과한 것이다. 속으로 성경을 몰라도 저렇게 모르는가 싶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믿으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스스로의 신실하심을 따라 일하시는 것이지 인간을 의존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서 있어서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믿지 않으신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늘에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홀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우리를 못 믿으시겠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분이 홀로 십자가를 지셔서 이루신 일이다. 심지어는 믿는 것조차도 우리의 자율에 맡겨두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보내셔서 믿게 하신다. 따라서 믿음조차도 성령께서 보증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다(1:12-14). 그 구원을 우리는 선물로 받았다(2:8). 이것을 믿는 자가 성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리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0-22)

 

(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