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34.사무엘상 30:1-31 아말렉을 진멸한 다윗

불편한 진리 2014. 9. 6. 20:19


사무엘상 30:1-31

아말렉을 진멸한 다윗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출전하였으나 다윗은 여러 장군들의 반대로 인해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왔다.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아말렉 군대의 기습으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아말렉은 성을 불태우고 여자들과 젊은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거기에는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포함되었다. 아마도 이 공격은 전에 다윗이 아말렉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복수일 것이다(삼상 27:8-12).

이 상황을 본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쳐죽이려 하자 다윗은 잠시 당황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 상황을 성경에서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6)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 어떤 힘을 입고 용기를 얻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말렉을 뒤쫓아 공격하라는 응답을 받은 것으로 낙심하지 않고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하여 하나님께 묻는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8)라고 말씀하셨다.

블레셋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윗이 기도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블레셋으로 왔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결정으로 블레셋에 왔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을 28장에서 사울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엔돌의 신접한 무당을 찾은 것과는 분명히 대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언약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 주고 있다.

다윗은 아말렉을 추격하는 중에 애굽 청년을 만난다. 그는 아말렉 사람의 노예였는데 병이 드니까 주인이 버린 자였다. 다윗은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말렉 군대의 위치를 알려주기를 구했다. 그리하여 다윗은 그 청년을 앞세워 아말렉 군대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아말렉의 군사들이 승리감에 빠져 술에 취해 있을 때 다윗의 군대가 그들을 급습하였다. 새벽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여 이튿날 해가 저물 때까지 그들을 쳐서 빼앗긴 모든 사람들과 물건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다윗이 빼앗긴 것을 금방 다시 찾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왜 아말렉에게 빼앗기게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의 군사들에게 보여 주시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다윗의 내부가 어떤가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아말렉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시글락을 바라보는 다윗의 부하들은 자신의 가족이 다 잡혀갔다는 것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말렉을 공격하여 가족들을 되찾게 되자 이것은 다윗이 빼앗은 것이다”(20/ 쉬운성경)라고 하였다. 다윗을 원망하던 부하들이 자기만족이 되니 금방 다윗을 치켜세운다. 이것이 바로 왕을 대하는 백성들의 마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록 만드시니 여지없이 원망이 드러났다. 이것이 그들의 본색이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다스리고 있는 백성들 내부가 어떤가를 드러내신 것이다. 그동안 다윗을 통해 받은 은혜는 안중에도 없었다. 한 순간에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은혜를 무시하고 원망을 쏟아내는 그들의 죄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셨다.

죄의 본성이란 인위적으로 막을 재간이 없다. 교도소를 더 많이 만들고 법을 강화한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차를 운전하다가 붙잡혀 벌금을 내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고 생각하지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에는 걸리기 않기 위해 더 노련해지고 교묘하게 교통법규를 어기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이러한 죄성을 어떻게 법이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막을 수 있는가? 이 땅의 어떤 법이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오셔야만 했고 그분이 지신 십자가에 의해서만 죄가 해결되고 의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

이방 땅 블레셋에서 편안하게 거하고 있던 다윗의 군대를 하나님께서 흔드시니 그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말았다. 다윗을 중심으로 한 언약 백성들은 결코 인간의 죄성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사용하셨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으로 하여금 다윗의 백성들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가게 만드신 것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윗이라는 지도자가 잘못해서 자기들에게 우환이 오고 지도자 다윗이 잘해서 행복이 온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는 있는 시점이라 지도자에 대한 관심이 많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 얼마나 잘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세상의 관심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대통령이 되려는 한 인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에 대해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누가 대통령으로 적합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우리 경제가 살아나며 복지가 얼마나 폭 넓게 이루어지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되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에 방해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쳐부수는 전쟁에 600명의 군사를 다 동원하지 않고 200명을 제외시켰느냐 하는 점이다. 다윗은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말렉을 좇아 브솔 시내에 이르자 힘이 떨어진 200명을 두고 400명으로 추격하였고 또한 그 숫자로 아말렉을 쳐부수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많은 힘을 주시지 않으셨을까? 아말렉 군사들을 추격하여 전쟁을 해야 할 상황에서 더 많은 군사를 모아도 부족할지 모르는데 많지도 않은 군사 600명에서 200명을 제외시키고 아말렉을 좇아가도록 하신 것에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

아말렉 군대 중에서 낙타를 타고 달아난 400명이 있었다(17). 낙타를 타고 달아난 자가 400명이라면 일반적으로 보병이 더 많다고 생각해 볼 때 다윗은 400명으로 훨씬 더 많은 아말렉 군사를 물리친 것이었다. 다윗이 이끄는 군대는 다윗의 지략과 힘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여호와 하나님의 힘으로 전쟁하는 군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 군대만이 언약의 나라에 합당한 군대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아말렉을 추격하면서 200명의 군사를 머물게 한 브솔 시내에 도착하자 남아있던 군사들이 승전한 다윗의 군대를 영접하였을 때 그들 가운데서 전쟁의 승리에 대한 공과를 따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아말렉과 직접 싸운 자들 가운데 일부 이기적인 자들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에게 진리품을 나눠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다윗은 그들을 엄하게 책망했다. “23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24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23-24).

다윗을 원망하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는 전쟁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은 그들의 힘을 빼는 작전이었다. 덜어내고 힘 빼기 작전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전쟁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단순히 전쟁에 직접 참여하였다는 것이 전리품을 다 가질 수 있는 당위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은 직접 전투에 참여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다 동일하게 분깃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의 이 명령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율례와 규례가 된다. 여기서 새로운 율례와 규례를 선포하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언약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이렇게 약한 자를 보호하여 공평을 유지하는 나라이다. 다윗도 약한 자였다. 왕으로 세움을 입을 때에 형제들 중에서 변방에 밀려있던 자였다. 다윗과 함께 한 자들도 가나안 땅의 족속들로부터 히브리사람으로 불리는 자들이었다.

다윗과 다윗의 군사들이 아직은 히브리인이라고 불리지만 언젠가 이스라엘로 불리고 이스라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군대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요 군대는 하나님의 언약의 왕이요 언약의 나라의 군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싸우는 왕과 군대는 결코 세상의 힘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다윗을 보호하시고 아말렉 군대를 다윗의 손에 붙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고 아말렉 군대를 다윗의 손에 붙이신 이 일을 통해 그 분깃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된 자들이 동일한 은혜로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루신 마귀와의 전쟁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의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2-24).

 

시글락에 도착한 다윗은 아말렉으로부터 탈취한 전리품을 유다 지파의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는 유다 지파 사람들이 흩어져 있는 여러 지역들에 위치한 성읍들에 나누어 보냈다. 그렇게 함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인 아말렉 군대를 자기의 손에 붙였음을 알렸던 것이다.

이렇게 다윗이 아말렉을 물리친 것은 사울이 왕으로 취임하여 아말렉과의 전쟁에 임한 것과 대조된다(참고 삼상 15:1-10).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였으나 사울은 그것을 거부하고 진멸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아말렉과 싸운 것과는 달리 아말렉을 물리칠 때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승리하게 되었음을 드러내어 언약의 왕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말렉에 대하여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다(26).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아말렉을 다 진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강론의 제목을 아말렉을 진멸한 다윗이라고 붙인 것은 사울 왕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못한 것과 대조하기 위해서이다. 사울은 실패하였지만 다윗은 아말렉을 진멸하여 유다 지파들에게 알리면서 서서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왕이란 이렇게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왕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