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26.사무엘상 23:1-18 그일라를 구원한 다윗

불편한 진리 2014. 9. 2. 21:34


사무엘상 23:1-18

그일라를 구원한 다윗

 

다윗은 사울 왕이 에돔 사람 도엑을 시켜 제사장 집안을 집단 살해했다는 소식을 아비아달로부터 들었다. 이 때 다윗의 심정을 우리는 시편 52편을 통해 살펴보았다.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해서 사는 강포한 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실 것이라고 맡긴다.

그즈음 블레셋 군대가 그일라 지역을 공격하여 타작마당을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일라는 헤브론의 북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여호수아에 의해 유다 지파에 할당된 지역이었다(15:44). 사울도 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나 왕으로 백성들을 지키는 임무를 하기보다 다윗의 지파인 유다 지파를 홀대하고 다윗을 잡고자 하는 마음에 의도적으로 블레셋의 공격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윗은 그 긴박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하나님께 간구했다. 다윗을 따르던 자들은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무모한 행위라 여겼다(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 전쟁하여 그일라 백성들을 구원하도록 말씀하셨다. 이때 다윗의 군대는 400명에서 600여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13).

여기서 다윗과 사울 중에서 누가 언약의 왕 다운 모습인가를 대조해서 보여 준다.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하면서 철저히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였으나(2,4) 사울은 오로지 부하들이 전해주는 정보에만 의지하여 자기 지혜만 믿고 주어진 상황과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였다(7). 이런 점에서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한 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언약의 왕의 표상이었다.

이 전쟁은 다윗의 군대가 사울의 통치를 떠나 이방 족속과 싸운 첫 전쟁이었으며 다윗이 사울 왕의 군대장관으로서가 아닌 독자적으로 블레셋과 싸웠다는 것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이러한 다윗의 왕국에 대하여 구체적인 계시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무엘서는 제사장들의 에봇에 대하여 언급한다(6). 에봇은 대제사장의 의복 위에 입는 겉옷인데 거기에 판결의 흉패라고 하는 우림과 둠밈이 있어서 여호와의 뜻을 밝혀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8:29-30, 8:7-8).

다윗은 선지자 갓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으며(삼상 22:5), 제사장 아비아달이 함께 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를 보여줌으로 언약의 나라다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는 나라가 언약의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인도하시는 언약의 나라의 왕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으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일라를 구원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희생은 조건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희생을 하는 자는 자신이 살고 죽는 일과 상관없이 말이다.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한 후 그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졌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7). 이런 말을 통해 볼 때 사울은 하나님이 마치 자신의 편에 서있는 것으로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력을 총동원하였다(8).

불안감을 느낀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여쭈었다. “10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10-11).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물었다.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12).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그일라를 구원한 일로 다윗은 허탈감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다윗 자신에게 유익되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히 그일라까지 가서 블레셋과 싸운 수고만 하였을 뿐이었다. 다윗으로 하여금 그일라를 구원하게 하셨으면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그일라까지 쫓아오지 못하도록 막으시면 좋은데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일라를 구원하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일라 백성이 나를 사울에게 넘겨줄까요?”(11/ 쉬운성경)라고 하였고 또 그일라 백성이 나와 내 부하들을 사울에게 넘겨주겠습니까?”(12/ 쉬운성경)라고 하나님께 물었다. 이 간구를 통해 볼 때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한 일을 통해 자신의 세력이 더 폭넓어지고 그일라 성읍이 사울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그일라를 구원해 주면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고 자신이 편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일라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변은 그일라 백성들이 결코 다윗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사울 왕은 물론 유다 지역의 백성들조차도 다윗의 편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하였지만 그것이 다윗을 왕으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일라 사람들은 아직도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왔다면 당연히 사울에게 고발한다는 것이었다. 그일라 사람들이 볼 때 아직까지 권력을 잡고 있는 자는 다윗이 아닌 사울이었다. 이렇듯 세상은 언제나 보이는 힘에 의지하게 되어 있다. 아니 언약의 편에 있는 자는 세상의 힘에 의해 밀려나고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하도록 하시고 그곳에 머물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을 통해 그일라가 그의 피난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아니 언약의 왕이나 백성들은 보이는 힘을 의지하는 세상에서 결코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이렇게 무수히 하고 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14:6)

 

16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59:16-17)

 

3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셀라)(61:3-4)

 

6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62:6-8)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71:7)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142:5)

 

다윗은 하나님만이 피난처이며 산성이요 요새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다윗이 하나님을 피난처, 요새, 산성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자신이 피할 곳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에 자기 피난처를 만들고자 하는 다윗에게 오히려 피난처를 없애는 분이다. 결국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산성, 요새, 피난처라고 고백하는 것은 세상에는 자신이 피할 곳이 없으며 또한 피할 곳도 아님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만이 자신의 피난처요 산성이 되신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비록 쫓겨 다니는 상황에서 피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그분이 피난처요 산성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피난처는 세상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은 그분이 세상에 우리의 피난처를 마련해 주시고 늘 세상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귀의 권세로 넘어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자가 그분을 피난처로 여기고 사는 자의 모습이다.

그일라를 떠난 다윗이 십 황무지 수풀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을 보내셨다. 그리고 언약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요나단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17)라고 하여 요나단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이 될 것임을 인정하였다. 이를 통해 다윗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확증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또한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언약의 나라의 왕위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말씀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