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22.여호수아 24:1-33 여호수아의 고별사(2)

불편한 진리 2014. 9. 5. 19:36


여호수아 24:1-33

여호수아의 고별사(2)


본 장은 앞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장로들과 두령들, 재판장들, 유사들과 함께 모든 지파의 백성들을 함께 모으고 여호수아가 선포하는 메시지이다(1). 14,1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16)라고 했다. 분명히 여호와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다시 말하기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19)고 한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조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시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여기서 하는 말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고 한다고 해서 양자를 택일해서 잘 살라고 하는 권면이 아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에 대하여 아니 죄인에 대하여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 그것은 곧 죽음이요 멸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장황하게 다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열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언약을 가지고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설명함으로 철저히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 즉 인간의 힘으로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광야를 지나올 수 있었으며,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라는 것을 강조함으로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본문에서 내가라는 말, 즉 하나님이라는 말이 12번이나 반복되어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과거란 하나님이 철저히 개입하심으로 아니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과거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에 잠겨보자는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오래 전에 조상 아브라함 때에부터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지나온 과거 속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확실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오늘 현재 이 자리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과거의 하나님과 현재의 하나님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항상 변화한다. 과거의 하나님과 현재의 하나님을 각기 다르게 생각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와 나쁜 일이 있을 때의 하나님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이해하다가도 나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며 불평을 하기도 한다. 과거에 좋으신 하나님이었다면 현재에도 좋으신 하나님이어야 한다. 과거에는 좋다가 현재는 나쁘다면 그것은 한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을 각기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 이유이다. 자신의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맞는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시작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날 너희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이유라는 것이다. 과거에 애굽에서 고생을 하던 것이나 홍해의 위기를 겪게 된 것이나 광야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생각만 하지 말고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늘 체험하여야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늘 체험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이방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섬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고 그것들을 섬긴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있다는 증거이다. 현재에 대한 불만이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항상 현재적인 것을 말한다. 과거에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과거는 어디까지나 지나간 것이다. 지난 과거가 현재의 신앙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부모님의 신앙이 나의 신앙이 될 수 없고 과거 한국교회가 일제 치하에서나 6.25때 순교했다는 것이 나의 신앙이 될 수 없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렇게 나열하고 있는 것은 옛날에는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렇게 잘나가는 때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이스라엘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나를 있게 했다면 오늘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 현재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불평이나 원망이 있을 리가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만나고 삶으로 증거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적은 것이 아니라 현재 처해 있는 곳에서 이미 받은 은혜를 생각할 줄 모르는 데 있고 또한 그 은혜를 따라 넉넉하게 살아가지 못하는데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불만족과 원망이 끊어지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아무것도 믿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믿을 대상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믿고 살아가던 존재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더 잘 알 것이다. 돈을 믿든지 아니면 권력을 믿든지, 그것도 아니면 자식을 믿든 자기 직장을 믿든 사람은 누구나 믿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에 안주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믿고 의지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을 붙들고 있던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나 자신이었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였는가? 신앙의 출발이 자기 자신이었다면 지금도 얼마든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도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출발이 나 자신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믿어진다면 우리는 어찌 우리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으며, 신앙을 포기한다는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어떻게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며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를 여호수아로 하여금 말씀하게 하시고 그 증거로 큰 돌을 취하여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이 돌이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26,27).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죽인 현장인 십자가를 증거물로 삼으셨다. 십자가 자체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표적으로 삼아서 늘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증거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심판의 근거로 삼으시겠다는 의미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1:7)는 말씀은 오늘날도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를 주님을 찌른 자로 보시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믿고 사는가? 그것은 곧 십자가를 심판과 구원의 근거로 되는 것으로 증거하며 살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