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21.여호수아 23:1-16 여호수아의 고별사(1)

불편한 진리 2014. 9. 5. 19:34


여호수아 23:1-16

여호수아의 고별사(1)


이제 우리는 여호수아 마지막 두 장을 대하게 되었다. 24장은 여호수아가 백성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백성들을 다 불러놓고 전하는 메시지이지만 본장은 여호수아가 주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을 불러놓고 당부하는 말씀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할 때의 상황을 1절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안식을 주셨다는 의미를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신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주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으로 벗어나 평화로운 상태로 살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특히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14) 말씀을 볼 때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었고 또한 여호수아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하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의 메시지는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6,7)고 한다.

그러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고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이방 민족에게 가지도 말고 그 신을 부르지도 말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하고 이방민족에게 가서는 안 되는가? 앞에서 보았던 대로 여호수아의 당부는 이스라엘이 어려움이 빠졌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안식이 주어졌을 때이다. 가나안 민족을 하나님이 다 물리치시고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안식이 주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3-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상관없이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대로 하신 일이다. 때문에 율법을 잘 지키면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고 가나안을 기업을 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고 이방민족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음으로서 어떤 상이나 대가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면 뭔가 주시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율법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무엇인가 주시기 위한 조건으로 명령이행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받기 위해서 행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신앙에 기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행함을 기준으로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6:8).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호수아는 너희는 지금껏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다 목격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목격을 하고 아는 자로서 율법을 행하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가나안 민족과 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착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도 아니다. 이미 오래 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작정하시고 세우신 여호와 자신의 뜻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고 애쓰고 안식을 주셨으니까 그 보답으로 너희들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에 힘쓰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너희들의 뜻과 요구를 내세우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은 앞의 22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22:16에 보면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여호와를 좇는 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는 모든 것들을 철저히 응징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상이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에 절하며 섬기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고 있는 말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싸우신 분이지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 안다면 결코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을 좇아 살게 된다.

그래서 8절에서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를 친근히 한다는 말은 여호와를 가까이 하고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는가? 결코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뜻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사랑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지금껏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 애굽에서 나오게 되고,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힘센 가나안 민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땅을 기업을 얻게 된 배경에는 모두가 하나님이 살아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귀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서 지금껏 살아왔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신뢰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힘이나 재능이나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며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약대로 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뜻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서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했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율법을 지키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며 살아갈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으로 본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랑을 받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1-13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다는 증거로 가나안 중에 남아 있는 민족들과 더불어 친근히 지내고 혼인하고 피차 왕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가나안의 남은 민족을 쫓아 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되도록 하시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시키겠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심하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말씀이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으로 보면 예수 믿지 않는 자와 혼인도 말고 교제도 말고 친하게 지내지도 말라는 말씀처럼 들린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사고방식을 따르거나 그들의 사상에 합류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친근히 지내고 혼인하고 피차 왕래한다는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과 하나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방인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과 하나 된 상태로 산다면 그것은 결국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누구의 후손이냐를 보시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는가를 확인하심으로서 이스라엘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오늘날 언약을 성취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그 속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피를 믿는 자로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언약에 합류된 자로 살아가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