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12.여호수아 12:1-24 이스라엘의 승리

불편한 진리 2014. 9. 5. 18:19

여호수아 12:1-24

이스라엘의 승리


여호수아 11장까지를 통해 가나안 땅의 북부지역까지 정복한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본 장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즉 모세가 살아 있을 때에 행해진 전쟁과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을 정리하고 있다. 전쟁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기보다는 정복된 족속들의 왕들을 나열한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지나간 전쟁에 대해서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더군다나 요단강을 건넌 후에 있었던 여호수아의 전쟁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전쟁도 함께 말하고 있다. 1-6절에서는 모세에게 패한 왕들을 나열하고 있고 7-24절에서는 여호수아에게 패한 왕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여호수아가 무찌른 왕이 모세가 무찌른 왕들보다 많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이 행하고 있는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전쟁의 승리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지도자가 얼마나 위대한가 위대하지 않는가 하는 비교는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사람을 많이 모은 교회 목사는 위대하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위대하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라는 것도 언약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많이 모은 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명하려고 한다. 소위 말해서 꿩 잡는 게 매라는 말로 사람을 많이 모으고 큰 교회를 이루면 목회 성공의 정당성이 진리인 것처럼 말해 진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은 자신의 온갖 능력을 다 동원하여 사람을 모으는 일에 사력을 다하고 또한 그렇게 성장한 교회는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결국 자기 자신의 자존심과 결부된 공동체를 만들어 낼 뿐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아니다.

분명 이 시대는 복음을 복음 그대로 전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로 보인다. 복음을 복음 그대로 전하는 교회는 사람가지 않는다. 복음 자체가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으로 인하여 죄를 지적당하는 아픔이 있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설교는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수가 모이는 교회는 언젠가 성전(?) 건축을 계획할 것이고 그러면 많은 헌금을 요구할 것인데 그런 것을 애초부터 감당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작은 교회를 찾을 리가 없다.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에 가면 개인 사업적이나 영업적인 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고 뿐만 아니라 건축 헌금에 대한 부담도 덜하며 군중 속에 숨어서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데 굳이 작은 교회에 가서 이런 저런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회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양극화 현상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작은 개척교회들이 얼마 안가서 쉽게 문을 닫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리고 있다.

처음부터 교회를 성경적 입장에서 정리해 본 적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사, 부목사를 하다가 당회장 목사에게 설움을 당하는 상황이 되면 그것이 개척할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합리화하고 상가를 보러 다닌다. 적당한 상가가 잡히면 거기에 채워 넣을 성구(?)들을 노회나 선배 목회자들에게 구걸하러 다닌다. 그래서 설립예배를 드리고 시작을 하면 그것이 교회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만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단을 건너기 전의 전쟁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시는 것인가? 11:23에 보면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온 땅을 취함으로 인하여 전쟁이 그쳤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전쟁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모세 언약과 상관없이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모세 언약, 아니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여호수아에게 주신 것이다.

신명기 3:21,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가 목도하였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요단 동편에서 하나님이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정복하게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역시 정복하며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투에서 승리하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두려워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1:9)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결국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마음을 굳게 먹고 떨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언약을 바라보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모세에게 주신 언약대로 요단 동편에서 두 나라를 정복하게 하셨고 또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것이다. 꼭 모세가 있어야 일이 성사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늘 어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그것을 해결해 줄 영웅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가지고 일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무리 지으신다.

이것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에서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 시작과 끝의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동편과 또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들을 무찌르고 정복하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을 중심으로 반드시 마무리 지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본 장을 말씀하심으로 앞으로 가나안 땅을 살아갈 때에 결코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 계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만을 의지하고 살라는 것이다.

요단을 가운데 두고 모세가 여호수아로 교체되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수 있을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고 수많은 이적으로 광야를 지나오면서도 백성들로부터는 원망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모세였고 더 더욱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런 상황 하에서 여호수아에게는 크게 두려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된 것은 모세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고 요단을 건넌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은 모세가 없다고 해서 두려워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일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시행하실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참된 이스라엘로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희생시키신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이제까지 말씀하고자 하셨던 궁극적인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채우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있어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로 교회는 재산을 모으기에 바쁘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전쟁이든 여호수아의 전쟁이든 이제까지 치른 전쟁을 돌아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알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주님의 일을 알고 확인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나 크게 예배당을 짓게 하신 것에서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것으로 늘 감사하며 만족할 수 있는가? 성도의 입장은 새로운 감사의 조건이 있어야 감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꺾으시고 승리하신 그 승리 때문에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하는 입장이어야 한다. 십자가 사건을 늘 되새기고 확인하는 차원에서 계속된 감사가 없다면 우리는 오늘의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감사의 조건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