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7:1-11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시편 57편의 표제는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되어 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속에 있었던 것은 사무엘상 22장의 아둘람 굴과 24장의 엔게디 굴이 나온다. 분명 시편 57편은 이 두 본문의 배경이 될 수 있다. 시편 57편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아둘람 굴에 있을 때와 더 깊이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군사들을 동원하여 찾고 있는 상황에서 아둘람 굴속에 숨어서 이 찬양을 드리고 있다. 다윗은 이러한 상태를 무서운 사자들 가운데, 무시무시한 들짐승들 가운데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4절). 그리고 함정을 파고 덫이 놓인 위기의 상태(6절)로 표현하였다. 사울의 군사 3,000명(삼상 24:2) 앞에 놓인 다윗과 함께 한 400명의 운명은 실로 사자 앞에 놓인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다윗은 이 상태를 절망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아둘람 굴을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1절)라고 보고 있다. 하나님의 날개는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뚜껑(속죄소/시은좌)에 날개를 펼치고 있는 그룹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을 연상하게 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룹 가운데 좌정해 계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출 25:20-22). 다윗은 비록 자신이 아둘람 굴속에 3,000명의 군사를 피해 있지만 그곳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다스림 아래 있는 상태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위에 계시며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다윗이 왜 이런 고난을 겪고 있는가? 사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기 때문에 다윗이 이런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사울 왕이 폐위 된 다음에 차기 왕으로 세웠으면 다윗이 이런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있는 상태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시며 또 왕으로 세우셨으면 사울 왕이 속히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만드시지 않고 사울에 의해 이렇게 쫓겨 다니도록 만드시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여기 시편 57편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즉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굴속에서 호랑이 앞에 토끼와 같은 상태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날개를 경험하게 하시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는가를 계시하시기 위함이다. 즉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워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시기 위함이었다.
다윗은 이 찬양을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로 하였다. 알다스헷이란 ‘멸망시키지 마소서’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에 맞추어 드린 찬양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이 찬양을 통해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3절)라고 하였다. ‘보내심과, 구원’이 결부되어 있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믿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였다. 보내주실 구원자를 ‘인자’와 ‘진리’로 부른다. 인자와 진리는 언약적 측면에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7-18)
여기 은혜는 인자와 같은 말이다.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와 진리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아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주시지 않는 인자와 진리는 가짜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아들이기 때문이다. 독생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다는 뜻이다.
다윗의 고난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윗이 고난 당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오셔서 이 땅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야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범주는 분명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언약의 왕으로 세우신 그 언약의 범주 안에서이다. 즉 고난을 당하는 과정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언약의 특징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사울이 왕으로 있는 상태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도 고난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3절)을 묵상하면 할수록 흔들릴 수 없고 오히려 마음이 확실하게 정해질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7절). 그래서 내 영혼을 일으키고 비파와 수금을 깨워 가장 먼저(새벽)에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하면서(8절) 주의 인자(은혜)와 진리가 이 땅과 하늘에까지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더욱 하늘 위에 높이 선포되고 주의 영광이 온 세계에 드높여지기를 기도하고 찬양한다(9-11절). 실로 이러한 다윗의 기도와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고 언약적 성취에 대한 선포는 이 땅에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선포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에 마음이 빼앗겨 죄악의 길로 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늘 십자가가 생각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반드시 구원을 이루어내실 것이다(갈 3:1, 빌 1:6). 결국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분만 의지하도록 만드시는 은혜이다(고후 1:8-9, 살후 1:5).
시편 52:1-9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자
시편 52편은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사무엘상 22:7-8에 보면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다.
도엑이 원한 것은 사울이 제공하는 보수였다. 즉 사울의 권력에 굴복하고 그 권력에 의해서만 자신의 살 길이 열린다고 보았다. 세상의 힘이 자신의 힘이고 세상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 크고 더 강력하게 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자를 다윗은 시편 52편에서 ‘강포한 자’라고 하였다. 강포한 자는 간사를 행하고 악을 행하며 거짓을 사랑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여 자기 힘으로 스스로 든든히 서려고 하는 자라고 표현함으로 의를 대적하는 존재로 말씀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자신이 의롭다거나 의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도엑의 악한 행위를 보고 판단하실 자가 의인이라고 하였다. 6-7절에 보면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라고 노래한다.
다윗은 제3자가 나타나서 도엑에 대하여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는 것에 대하여 비웃고 그에 대하여 판단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고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악에서 벗어난 자가 의인인데 그가 도엑에 대하여 판단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이런 의인이 있는가?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은 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재물의 풍부함에 기대는 악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런 부분에 대하여 자유하고 재물의 풍부함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분이라면 분명 의인이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증거한다.
복음서에 보면 한 부자청년이 선한 행위를 통해 영생을 얻으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마 19:21). 그러자 부자청년은 재물이 많았기에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마 19:2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재물의 풍부함에 매여 있는 자는 결코 예수님을 소중한 분으로 여길 수 없고 그러기에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또한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버리셨다는 뜻이다. 이 땅에서 힘으로 삼는 재물의 풍부함을 거부하고 하나님만 자기 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재물의 풍부함과 세상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풍부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힘은 세상에서 휘두르는 권력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힘은 세상의 힘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유린 당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방법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세상의 힘이 하나님의 힘을 이긴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힘이 세상을 제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물의 풍부함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힘으로만 여긴 자리요 상징이다.
다윗은 강포한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에 맡기며(5절) 의인이 나타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아서 하나님의 인자를 영원히 의지며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이름’을 의지할 것이라고 고백한다(9절). 푸른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상징적인 표현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참고 시 1:3). 주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것은 앞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그분을 의지하겠다는 뜻이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푸른 감람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인자)를 누릴 수 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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