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4:1-22
블레셋에서 쫓겨난 다윗의 찬양
사무엘상 말씀을 나누는 중 우리는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진설병을 얻었으나 거기에 사울 왕의 신하 중 도엑이 거기에 있었기에 아히멜렉에게 있을 수 없어 가드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가드 사람들이 골리앗을 죽인 자로 알아보았기 때문에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 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다윗은 하나님 앞에 신앙고백적인 찬양을 드린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시편 34편 말씀이다. 본 시를 가드에서 벗어난 후 바로 지은 시인지 아니면 한참 후에 지은 시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윗이 가드에서 미친 체하여 쫓겨난 사건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편을 이해할 때에 가장 큰 문제점은 무조건 시편의 기록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시편의 상황을 자신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윗이 의인으로 표현한 것을 자신도 의인이라는 입장에서, 자신이 아닌 자들에 대해서는 원수로 생각하고 성경을 자기중심적으로 적용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을 이해할 때에 단순히 시편 기록자의 신앙 체험에 대한 고백적인 시나 개인적인 찬양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언약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을 가장 먼저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계시를 시라는 문학적 장르를 통해 찬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시편 34편은 각 절의 시작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지어진 아름다운 시로 표제가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붙어 있다. 배경이 되는 사무엘상 21장에서는 가드 왕 아기스라고 되어 있고 시편에서는 아비멜렉 앞에서 쫓겨난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아비멜렉이라는 명칭은 통상적으로 블레셋 왕에게 붙이는 칭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사무엘상 21:10에 의하면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라고 기록하였다. 비록 이스라엘의 왕권을 사울이 잡고 있었지만 실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은 다윗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두려워하여 블레셋으로 도망을 한 것이 잘한 일인가? 이러한 모습이 정말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왕의 모습인가? 더구나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미워하는 원수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가드는 과거 다윗이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고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블레셋 가드로 도망을 간 것은 아히멜렉에게 갔을 때에 본 사울의 신하 도엑으로 인해 더욱 다급하여 사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 이방인의 성읍으로 도망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본 시편을 통해서 보자면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 땅으로 도망한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 주고 언약적인 일을 계시해 주시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블레셋으로 몰아넣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언약의 어떤 면을 계시하시기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다윗이 가드로 갔을 때에 가드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보았다. 사울을 두려워하여 피한 곳에서 다윗은 이제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는 상황이 되었다(삼상 21:12). 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미친 체 하는 것이었다. 고대사회에서 미친 것은 악한 신에 의해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다윗을 어떤 초자연적인 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은 그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이렇게 다윗은 환란에서 환란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위협에서 구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다윗이 생각한 것은 감사할 것 밖에 없었다. 자신이 자랑할 것이라고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2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2-3절)라고 찬양을 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이 일을 통해 자신을 ‘곤고한 자’(6절)로 표현하면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8절)라고 고백한다. 자신이 피할 곳이 이스라엘도 아니고 더구나 블레셋 땅도 아니었고 이 땅 어디에도 자신이 피할 곳은 없었고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곧 참된 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환란을 당하는 곤고한 자는 세상의 어떤 곳이든 그곳은 위험한 곳일 뿐이고 두려움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에 피할 곳이 못되고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분 안에 거하는 그것이 복이라는 고백이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이 부르짖는 간구를 들으시고 보호하시며 환란에서 구원하신다고 찬양한다. 그러면서 다윗은 “19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19-20절)라고 노래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의 의미를 신약에서 요한 사도가 인용한 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9:36)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율법에 너무도 열심이었기에 죽은 시체를 안식일이 이르기 전에 빨리 내려 무덤에 두어야 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시체를 밤에 그대로 둔다는 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거룩한 땅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가서 혹시나 있을 범죄자의 도망을 막고 빨리 죽도록 뼈를 꺾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로마 병사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두 강도에게 가서 다리의 뼈를 꺾었으나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있었기에 뼈를 꺾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요한복음은 상세하게 이 현장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일어난 일은 성경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다리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이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요한복음 19:30에 보면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기록하였다. 즉 이미 돌아가셨기에 뼈가 꺾이지 않도록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고 또한 십자가에서 살아 있어서 로마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뼈를 꺾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고 그것을 온전히 성취하신 후 철저히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요한복음은 증거하고 있다.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였다.
그러므로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한 뼈를 꺾지 않고 보호하시는 대상이 의인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뼈를 꺾지 못하도록 보호하심으로 예수님만이 진정한 의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뼈를 보호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곤고한 자로서 고난을 당하신 ‘의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의인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분이다. 그분은 다윗과는 분명 다른 아니 미친 체라도 해서 살려고 하였던 다윗과는 차원이 다른 의인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서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다.
22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였다. 여기 ‘종들’이 누구인가 바로 ‘의인들’이다. 복수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속량하신 그들이 바로 의인들이 되었다는 차원에서 복수로 표현하고 있다. 다윗은 언약 안에서 바로 이러한 미래를 내다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의해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인이고 그에게 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8절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심을 입은 것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이 복을 누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주께서 주신 약속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17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두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그러나 너희 머리카락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19너희는 인내함으로 생명을 얻을 것이다(눅 21:17-19 / 쉬운성경)
이 말씀은 실제로 우리가 세상에서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시고 암에도 걸리지 않게 하시고 사업도 망하지 않도록 지키시고 자녀들을 공부 잘하도록 만드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사는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도록 반드시 주님께서 철저히 지키고 다스리신다는 뜻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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