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1:1-15
다윗과 아히멜렉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확실한 의도를 파악한 다윗은 요나단과 헤어져 본격적으로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처음 찾아간 곳은 제사장들의 성읍인 놉(삼상 22:19)이었다. 놉은 실로가 파괴된 후 그것을 대신하여 성소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이 그곳에서 아히멜렉을 만난 것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아히멜렉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읽은 다윗은 거짓말로 적절히 둘러댔다. 사울 왕이 자기에게 극비리에 맡긴 특별한 임무가 있기 때문에 다른 부하들 모르게 혼자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극비의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아히멜렉에게 우선 먹을 음식을 요구했다. 배가 고팠던 그는 허기를 면할 수 있는 떡 몇 덩어리를 원했다. 이때 아히멜렉에게 일반 음식은 없었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사용한 거룩한 떡인 진설병이 있었다. 제사장은 다윗이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않은 정결규례를 어기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그 떡을 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거짓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다윗은 그 전에도 거짓을 꾸민 적이 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지 그 속뜻을 파악하기 위해 요나단과 짜고 해마다 가족과 드리는 제사가 있어서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거짓말을 하게 했다. 여기서도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에 대해서도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거짓말에 대해 묵인함으로 마치 인정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거짓말을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었다는 것이다. 이 거룩한 떡이란 음식으로 먹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안식일부터 돌아오는 안식일까지 여호와의 성소의 떡상에 진열해 놓는 진설병을 말한다. 이 진설병은 안식일마다 새로 교체해야 하고 교체한 떡은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출 25:30, 레 24:8-9).
그런데 제사장이 아닌 다윗이 이 떡을 먹을 수 있는가? 또한 아히멜렉은 왜 이 떡을 다윗에게 주었는가? 이는 겉으로 보면 분명 율법을 어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부분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한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윗이 행한 일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3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3-8)
예수님의 말씀은 다윗의 행위나 아히멜렉 제사장이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준 것이 결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율법에 대한 생각을 달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달리 이해한다고 해서 전혀 새로운 방면으로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면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을 이야기하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과거 한국교회는 주일이 곧 안식일이었기에 안식일에는 돈을 쓰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저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것이 지금 옳으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율법의 진정한 정신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일하는 것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며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나타내셨다. 즉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에 그 안에서 행한 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으며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이는 예수님께서 곧 지실 십자가를 전제하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알았다면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비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즉 제사라는 의식을 행하는 것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자비라는 것이다. 율법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뜻이다. 율법 조항을 하나하나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자비를 율법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성소에 진열된 진설병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떡이었다. 진설병이 성소에 배치되고 반대편에 있는 등불의 비침을 받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설병이 안식일마다 교체되는 것은 안식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안식일마다 새롭게 하라는 뜻이었다.
이 떡을 거룩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제사장에게만 어떤 특혜가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진설병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갈 자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이 거룩한 떡이 주어졌다는 것은 결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의 의미를 잘 드러낸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오실 메시아의 역할을 잘 드러낸 사건이 된다.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된다는 것은 구약적 입장에서는 율법의 본질적인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맡겨진다는 것을 뜻하고 신약적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은혜와 자비하심에 맡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의 입장에서 믿는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구원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울 왕의 신하로 목자장인 에돔 사람 도엑이 있었다. 이는 앞으로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윗에게 닥칠지 모를 위기상황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는 언제나 자기 이익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다. 이러한 도엑이 거기 있었기에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아히멜렉을 떠나 아기스 왕이 통치하는 가드 지역으로 피신한다.
가드로 도망한 다윗은 아기스를 두려워하여 미친 체 하였다. 문짝에 이상한 낙서를 하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다윗을 본 아기스는 더 이상 견제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로 인해 다윗도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척 한 연기를 한 다윗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윗은 장래 언약이 주어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왕이 된 자였다. 이미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이방 땅에까지 가서 비겁한 이런 행동을 하는 자가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더구나 가드는 골리앗의 고향이었다(삼상 17: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가드로 도망하였다는 것은 지금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있으며 언약의 왕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모습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수용할 수 없는 모습임을 고발하고 있다. 다윗은 가드에서도 거할 수 없었다. 결국 쫓겨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시 34편)(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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