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0:1-42
다윗과 요나단
사울은 다윗을 죽이러 라마 나욧에 왔다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예언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다윗은 그곳을 떠나 요나단에게 갔다. 다윗은 요나단을 통해 자신을 죽이려하는 사울 왕의 의도가 확실한 지를 다시 한 번 최종적으로 확인하고자 하였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3절)라고 하였다.
요나단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호소했고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걸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기 때문에(삼상 19:4-6) 요나단은 그러한 사울의 맹세를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라마 나욧으로 간 사울의 일을 알지 못한 요나단으로서는 다윗의 말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아들인 요나단이 슬퍼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일을 숨긴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위기에 대해 호소를 하였다. 그리고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을 미리 알아서 다윗을 구하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에 대한 교훈을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대해서 말한다. 다윗이 어려울 때 요나단이 돕는 것을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 참된 친구라는 교훈을 중요한 메시지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의 이야기를 단순히 친구의 우정에 대한 교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요나단이 다윗을 돕는 것을 보면 사실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요나단이 다윗을 돕는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며 또한 차기에 사울을 이어갈 왕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 된 자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다윗으로 인해서 왕위를 포기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요나단도 사울을 도와서 다윗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을 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다. 다윗으로 인해서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고 집안 대대로 왕권을 이어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가? 이는 요나단에게 있어서 왕이라는 지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다윗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요나단이 다윗을 통해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생각했는가?
15-16절에 보면 요나단이 “15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의 대적이라 하면 누구를 말하는가? 바로 사울의 집안으로 요나단 자신의 집안이다. 이것을 보면 요나단은 단순히 우정의 차원에서 다윗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요나단은 자신의 가문을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멸망의 가문으로 보았다.
요나단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가문을 그렇게 보는 것인가? 그리고 다윗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깊은 호의를 보이며 보호하려는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었다. 요나단은 자신의 집이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받을 때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다윗의 집과 언약을 맺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다윗 편에 서서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며 돕는 이유였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죽을 자기 목숨을 다 던져서라도 사랑해야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요나단이 왜 굳이 다윗과 언약을 맺어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멸망시킬 것을 알고 있었다면 요나단이 직접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요즘 소위 말하듯이 집안의 저주를 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요나단이 자신의 집을 멸망의 가문으로 봤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 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받을 모습으로 생각하게 된 것인가?
사무엘상 19:5에 보면 요나단이 사울에게 다윗에 대해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라고 하였다. 즉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건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에 다윗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요나단에게 있어서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 된 자였고 그러한 다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훼방하는 대적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멸망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다윗과 언약을 맺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자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아브라함 언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을 다윗에게 붙여 이러한 언약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나 사울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언약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다 드러내고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는가? 무엇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가? 십자가가 믿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이 믿어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신과 자신의 집이 멸망 받아야 마땅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다윗과 함께 다시 한 번 언약을 확인한 요나단은 이제 사울의 본심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24-34절),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린 뒤에 서로의 이별을 매우 슬퍼한다(35-42절). 그리고 요나단은 다윗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요나단으로부터 다윗이 월삭 만찬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들은 사울은 다윗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며 노를 발한다(31절).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직접적인 동기를 밝히는 최초의 언급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요나단과 언약을 맺자고 제안을 해야 맞는 상황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은 다윗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맺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요나단에게 합류되는 상황이 아니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합류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속성이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역사를 진술해 나간다. 비록 위험에 빠져 있는 자는 다윗이지만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골리앗을 물리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누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지를 요나단으로 하여금 분명히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사울과 요나단의 혈육관계도 깨뜨리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4-39)
사람들은 늘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편이냐 아니냐를 따진다. 혈연, 학연, 지연 등으로 서로 얽혀 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인맥에 의해 움직인다. 그래서 많은 인맥을 유지하는 것이 세상에서 잘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갈라놓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거부하며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모습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주어진 목숨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이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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