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20.사무엘상 19:1-24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불편한 진리 2014. 8. 30. 13:37


사무엘상 19:1-24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사무엘상 18장에는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의도가 세 번씩(11,17,21)이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들이 실패하자 사울은 이제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분명한 의도를 보고서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려는 그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호소한다. 4-5절을 보면 4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여기서 요나단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처단한 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푸신 큰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블레셋에 대한 다윗의 승리에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았던 것이다. 즉 다윗을 내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왕권을 위협하고 있는 다윗이라는 한 인물을 보고 있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에게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울이 이토록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권력욕에만 사로잡혀 있었기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왕의 계보를 이어갈 다윗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자신의 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다윗을 죽여야만 했다. 사울은 백성들의 인기에 의해 왕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죄인에게는 누구나 사울과 같은 이러한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서 나보다 훨씬 나은 모습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렇지 못하고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면서 자기 사랑에 대한 욕망을 끝없이 펼쳐내고자 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심지어는 죽여서라도 밟고 올라서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하여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남을 죽여서라도 자기 승리를 만들어내면 영웅이 된다. 그 영웅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요한복음 11:50에 의하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는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인 가야바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가야바는 자기 권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고 로마로부터 유대라고 하는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한 사람이 희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예수님을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상의 사고방식은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시켜도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은지에 대한 기준이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야바의 이러한 말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의미하는 본질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유대민족을 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한 사람의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7-19)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정신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정신은 다른 사람을 밟아서 올라서야 하고 상대방을 죽여서라도 자기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도록 하시니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뿐이다.

 

본문 8절에서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 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라고 기록하였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시 승리하자 사울은 다시 시기심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지만 다윗은 이를 극적으로 피하고 미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 사울은 군사들을 보내어 아침이 되면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모든 음모를 안 미갈은 밤에 다윗을 피신시키고 침상을 우상으로 꾸며 다윗이 환자가 된 것처럼 꾸몄다. 결국 사울은 딸 미갈에게 속아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울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누구 때문인가? 아들 요나단과 딸 미갈 때문이다. 즉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인해 다윗을 죽이는 일에 방해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사울은 이러한 일들로 인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일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나 결코 그렇지 못하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아들과 딸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갈 왕 다윗을 보호하셨다. 그 어떠한 인간의 악한 계획도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 앞에서는 헛된 것일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까지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는 일로 만드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미갈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다윗은 그 길로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간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모든 것을 알리고 사무엘과 함께 나욧(지명이라기보다 선지자들을 위한 생활 숙소로 추정된다)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 사울에게 알려졌고(19) 사울은 다시 한 번 다윗을 죽이고자 군사를 보낸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부하들에게 임하여 예언하게 함으로 사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 이후로 사울은 두 번 더 군사들을 보내지만 매번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침내 사울이 직접 다윗을 제거하기 위하여 라마의 나욧에 이르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강하게 사로잡혀 예언을 한다. 심지어는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워있게 하였다(23-24).

사울은 왕궁과 권위를 상징하는 왕의 의상을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선지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예언을 하였다는 것은 그의 모든 체면과 지위를 벗어던진 상태를 말해 준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사울을 무장 해제시키신 것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후에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라는 속담이 생겼다. 이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사울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 가운데 있는 기이한 현상을 말하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강하고 저항 할 수 없는 능력 앞에 사울은 그야말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울의 아들과 딸을 통해 사울의 손으로부터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영이 직접 다윗을 구원하시는 일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사울에게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도록 만드시며 또한 이 일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사울은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예언을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지는 배경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면 그 사람은 평소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거나 좋은 일을 많이 하거나 선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에게 초점을 둔 잘못된 생각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고 부르신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인간의 자질이나 성품이 좋아 그것이 바탕이 되어 하나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좇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어떤 자이든지 상관없이 심지어 나귀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은 사울 한 개인의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그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왕이시며 그 통치 아래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언약을 드러내야 할 나라로 부름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나마 사울까지 합류시켜 언약의 나라가 누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나갈 것인가를 보여 주셨다. 이 나라는 이제 다윗을 중심으로 세워져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영이 직접 개입하여 보여 주신 것이 사울이 예언을 한 사건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