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야고보서

05.야고보서 5:1-20 재림에 대한 교회의 인내

불편한 진리 2014. 8. 28. 22:37

야고보서 5:1-20

재림에 대한 교회의 인내


1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6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단순히 재물이 많다고 부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1:10에서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자랑으로 여기는 것들을 풀의 꽃과 같이 지나는 것으로 인정하고 믿는 자라면 부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도 재물을 얼마나 쌓았느냐 하는 것으로 부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자, 즉 의인을 정죄하고 죽인 그것이 바로 부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런 부한 자들은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재물을 쌓는 즐거움으로 살아갈 뿐인 것이다. 성도는 옳은 자가 정죄를 받아 죽임을 당하는 모습에 함께 있는 자이다.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12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세상의 부자에 대하여 대항하는 자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길이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무작정 참으면서 시간만 보내면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입장에서는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어려움을 고난과 어려움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심판주가 바로 앞에 계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다.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의미는 그분을 믿는 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에 대하여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다.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오직 아니오만 있을 뿐이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13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이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이다. 특히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많은 교인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맹종을 생각하기도 하고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교인들을 잘못된 믿음으로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무슨 병이든지 치유하기 위한 믿음을 가지거나 치유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서 5장 전체가 바로 교회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의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핍박을 당하는 그런 상태를 두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7절 이하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7,8)고 했다.

이 때 성도라면 땅의 것으로 맹세함으로 고난을 일시적으로 모면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는것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것이 죄 정함을 면하는 길이다(12).

그러므로 13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고난으로 인하여 육신이 병들었든지 아니면 마음이 연약해졌든지 그 사람은 교회의 감독자를 청한다. 교회의 감독자를 청한다는 말은 여기서 교회라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로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여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그 병든 자를 구원하고 일으키시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낫게 하고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기도에 의한 응답으로서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기도와 상관없이)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서로 죄를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기 때문이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인간의 기도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밝혀준 것처럼 말씀 안에서 고난을 받는 자들이 의인이요 그 의인들이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의를 알고 있는 장로는 교회의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헌신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는 반드시 잘못함으로 인하여 질병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죄인의 상태가 어떤 뜻으로 주어지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즉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이 땅에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질병이나 고통, 결핍, 가난 등이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죄 용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혹시 질병에서 고침 받았다면 그 고침 받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죄사함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참고 막 2:5-11).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도는 진리 편에 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18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19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이제 야고보는 그 실례를 구약의 엘리야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엘리야가 비가 오도록 기도한 것은 갈멜 산의 대결을 통해서이다(왕상 17-18). 이스라엘은 죄를 범했고, 하나님은 3년 반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심으로 심판하셨다. 엘리야와 바알의 제사장들과의 갈멜 산 대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회개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비를 내리시되 엘리야가 기도하는 것을 통해 비를 허락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엘리야만이 의인이요 그 의인의 기도를 통해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의인을 통해 드러내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엘리야의 시대에 약속을 가지고 일하셨던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약속의 성취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진리이시고 약속의 성취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분의 기도만이 의를 이루는 것이 되고 그 기도만 응답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에 의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진리의 편으로 끌어들이신다. 결국 의인은 고난 중에 있든지 아니면 즐거움 중에 있든지 언제든지 기도하며 찬양하게 되는 자이다(13). 즉 세상 것을 바라보거나 고난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이다. 누가 이렇게 살 수 있는가? 예수님만이 이렇게 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시는 것은 언제나 예수님의 몫이다. 그분이 오늘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 백성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의를 담고 있는 자가 하는 일은 진리에서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는 것이고, 사망에서 구원하는 증인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19,20).

이렇게 보았을 때 본문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고해성사 및 종부성사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아니다. 또한 한국 교회에서 병든 자가 목사를 청해서 기도를 받고 죄를 고백하라는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야 할 말씀도 아니다. 기도란 인간들이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란 오직 하나님께 드릴뿐이다. 그 응답은 인간 편에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병든 자를 위하여 날마다 병이 낫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업이 망한 교회의 기둥 집사 같은 사람을 위하여 다시 사업이 성공하도록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할 일이 아니다. 교회는 진리를 증거하는 증인들의 모임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진리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자기 죄와 주님의 은혜에 날마다 비추어 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 점검이 늘 있는 자를 두고 성도라고 하고 그 모임을 교회라고 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