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야고보서

04.야고보서 4:1-17 세상과 하나님

불편한 진리 2014. 8. 28. 22:35

야고보서 4:1-17

세상과 하나님


야고보는 3:13-18에서 두 종류의 지혜를 다루었다. 그것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위로부터 난 지혜이다. 세상적 지혜는 시기와 다툼 또 그 결과로 나타나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과 직결된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편벽도 없고 거짓이 없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세상적 지혜는 세상에서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게 하지만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평화를 유발한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서는 성결과 화평을 도무지 볼 수 없고 하늘로부터 주어진 지혜이신 예수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예수님임을 암시하면서, 야고보는 이제 4장에서 싸움과 다툼이 어디서 나느냐고 하면서 그 근원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여기서 싸움이란 계속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전쟁을 의미하고, “다툼이란 이따금씩 싸우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싸우게 되는 것은 계속적인 적대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야고보는 성도들 간에 싸움과 다툼이 있다는 것은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화평케 하고 의의 열매는 거두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싸움과 다툼이란 세상적 지혜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1:5에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늘의 지혜를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것을 계속 추구하며 세상과 벗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결국 서로 다투고 싸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흔쾌히 응답하신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81:10)라는 말씀을 마음대로 인용하면서 교회의 욕심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이 말씀은 시편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 풍습을 염두에 둔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자기 집에 손님이 오면 가장 좋은 것을 넣어주어서 손님을 기쁘게 하였었다. 이런 점에서 이 말씀은 양의 풍성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지신 새로운 은사를 주어서 너희들을 기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입을 벌리는 각도에 따라서 많이 들어온다는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비전과 욕심이 크다고 칭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를 부흥시키고 활성화시킨다는 명분하에 경쟁과 욕심을 장려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심지어 핍박하기까지 하는 현실이다.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면 무능하고 목회자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또 교회를 부흥 성장 시키고자 하는 욕심이 있더라도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거나 자기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 기도하였기 때문에 부흥이 되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으며 마치 교회를 부흥시킨 목회자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 전도하고 기도하였기 때문인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하늘의 것은 하늘의 지혜로 구하게 되어 있다. 하늘의 지혜로 구한다는 것은 성결이요 화평이며 관용이고 양순이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한 것이기 때문에 의의 열매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교인수를 많이 모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결과 화평, 긍휼과 거짓이 없는 의의 열매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드러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시기하는 죄악을 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달리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의 의미를 인용해서 말씀이 선언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말씀에 의해 지배를 받는 자가 성도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는 자가 성도라는 의미이다.


6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성경에서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적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헛된 것이 아니라면 성령님은 자기 백성들을 지배하고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성도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겸손해야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겸손해지고 그러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은혜는 베풀어지는 것이다.

싸움과 다툼은 세상적 지혜, 즉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진 자들이라면 하나님께 순복하면서 마귀를 대적하게 된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무조건 우리가 직접 싸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적 지혜로 말미암아 나오는 싸움, 다툼, 정욕을 적으로 간주하고 늘 대적하는 자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성도는 항상 그 삶의 방향이 하늘로 향해 있어야 하고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여기서도 구약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성결케 하라!’ 이렇게 하면 은혜를 베푼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는 항상 이런 자세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우리는 이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 이것은 기독교의 분명한 진리이다. 세상은 자신을 높이고 자랑해야 하나 하늘의 지혜를 입은 자는 자신을 낮추게 되어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2:6-1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자이다. 높아질 것을 계산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죽어질 때에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11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싸움과 다툼이라는 분쟁은 현실적으로 형제에 대하여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비방이란 자신이 높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낮게 평가할 때에 생기는 것이다. 율법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기 때문이다(2:8).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을 이웃을 향해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할 책임만 있을 뿐이지 율법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책임은 없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도 사람이 율법의 재판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재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생각하는 마음이 교만이다. 이는 곧 자신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랑이다.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와 일의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존심 그것이 바로 죄다.

그러나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우리의 생명은 죽은 목숨이다. 겉으로는 큰 소리치고 강한 척 하나 실제로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인간은 죽은 것이다. 안개와 같은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은 연속적인 권한이 아니라 매일의 긍휼이다. 주님의 뜻에 좌우되는 긍휼이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허탄한 자랑이다. 아니 그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일시적인 안개와 같은 것이며 헛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로 이렇게 주님의 뜻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무엇이 선인지 안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없다면 그것이 곧 죄 가운데서 죄를 범하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