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야고보서

02.야고보서 2:1-26 행함과 믿음

불편한 진리 2014. 8. 28. 21:51

야고보서 2:1-26

행함과 믿음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모로 상대방을 판단한다. 외모란 사람의 얼굴을 보고 판단하는 것, 곧 사람의 외적인 지위나 상태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사람을 주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신분이나 지위를 따라 차별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성도는 왜 사람을 외모로 취할 수 없는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성도 안에 심겨졌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할 수 없다. 주님은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그분께 속한 자라면 주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4절에 보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차별을 한다는 의미이다. 차별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참고 고전 1:26-29).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라고 야고보는 밝히고 있다(5).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다는 것은 결코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거나 가난해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는 세상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이고,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는 것은 곧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야고보가 1:27에서 정결한 경건을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하였을 때에 그 의미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가난한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압제받고 가난한 상태에 있었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언약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정결한 경건이라는 의미는 언약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게 되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것이 정결한 경건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언급하는 이런 말씀은 오늘날도 무조건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도와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제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구제란 성도에게 행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그러므로 성도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하는 가장 주된 일은 복음을 복음답게 드러내고 증거하는 방식이 증인이 되는 것이고 교회 내에서 구제를 행하는 것이다.


8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야고보는 이처럼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계명을 인용한다(8, 19:18). 야고보는 이 계명을 최고한 법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최고한이라는 말은 왕적인’, ‘왕 같은’, ‘숭고한이란 뜻이다. 이는 이 계명이 다른 모든 계명들을 포함하는 계명이기 때문에 그 지고한 성격을 인하여 이렇게 불린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로 말씀하시면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과도 같다(22:37-40).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의 믿음을 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하나를 어긴 것은 모두 어긴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10). 모든 율법을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생활을 통해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한다. 아니 잘 되지는 않지만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예쁘게 봐 주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율법들도 새로 신약화 시켜서 오늘날의 율법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를테면 구약의 안식일은 오늘날 주일로, 제사장은 목사로, 성전은 예배당으로, 제사는 예배로, 절기들은 한국 교회에서 정한 각종 절기들로 율법화 되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 지켜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표시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율법 하나를 어긴 것은 모두를 어긴 것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 가지를 어겼다면 모두를 어겼는데 몇 가지를 잘 지킨다고 해서 어긴 한 가지의 율법을 덮어서 상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오늘날 모든 규례들을 율법화 하여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함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성도여야 한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저주를 주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이고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할 것들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켜서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모든 것들이 내게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12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두 구절은 앞에서 말한 것들의 결론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된 말은 긍휼이다. 이는 곧 가난한 자, 힘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 율법이다. 따라서 긍휼은 율법의 근본정신이다. 계명 자체를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믿음의 실행과 연결된다는 것이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13절에서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죄악 된 삶 자체를 본다면 죄악을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흘러나오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삶인 것이다.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제 야고보는 본격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은 무슨 유익이 따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또 가상적 예를 하나 들고 있다. 헐벗고 굶주린 형제에게 말로써만 평안을 빌고 배부르게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믿음행함의 대비가 아니라 말뿐인 것행함사이의 대비이다. 말뿐인 것은 믿음이 아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여기서 믿음은 있지만 아직 행함이 없는 믿음행함이 있는 믿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아닌 것’(말로만 있다는 믿음)참된 믿음’(행함이 있는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18절 말씀은 많이 오해되고 있는 말씀인데 그 분명한 의미는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너는 너의 행함으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그리하면 나도 나의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여튼 이 구절에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은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것을 당연시하면서 도리어 책망조의 질문을 던진다. 귀신들에게도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 귀신들이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볼 수는 없다. 귀신들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아무 효력도 없으며 의미도 없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들이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안다는 지식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끝이다. 우리도 이런 믿음이라면 귀신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할 때에 단순히 복음그리고 십자가를 내가 지식적으로 안다는 차원에서 믿는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사건을 예로 든다. 그 첫 번째 것이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사실 야고보가 사용하고 있는 행함이란 말은 믿음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믿음=행함’, ‘행함=믿음으로 야고보는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말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가 그 둘을 다르게 보고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다고 말하면서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 교회에 나왔다고 하여서 무조건 믿음이 있다고 인정한 데서 빚어진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을 환언하자면 하늘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나타나게 되고 그 행함으로 증명되어진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에는 항상 행함이 따랐고 그의 행함으로 온전한 믿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에 죄인은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셔서 믿음으로 행하시는 행위들을 가리킨다(참고 갈 2:20).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라합은 이방인 여자이며 신분도 기생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고상한 아브라함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천한 라합도 증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를 통해 야고보는 특별한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항상 동일한 진리이며 또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같은 진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은 율법으로 구원 받고 신약에 와서는 믿음으로 구원 받고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은 구약 시대든 신약 시대든 동일하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여기서 영혼이란 주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의미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몸 자체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주님과의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