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야고보서

01.야고보서 1:1-27 정결한 경건

불편한 진리 2014. 8. 28. 21:50

 

야고보서 1:1-27

정결한 경건

 

 

야고보서는 전통적으로 베드로전후, 요한123, 그리고 유다서는 공동서신 혹은 일반서신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회람(回覽) 형식, 즉 모든 교회들이 돌려보면서 읽도록 기록된 서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 서신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여 본서를 가지고 교회 봉사를 강조하며 더 나아가서 마음껏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우리의 행위를 강조하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믿음을 강조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서는 참된 믿음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책이다.


1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본서의 기록자를 야고보라고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생각된다. 여기서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소개한다.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서 누구의 종이라는 표현,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의 종이란 표현은 사실상 수치스러운 소개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21:23).

그러나 야고보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격인 관계로 표현함으로 결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야고보 자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기를 즐겨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소개하는가?

우리는 사회에서 저명한 인사나 혹은 권력이 있는 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말한다. 소위 말해서 힘 있는 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자기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인해 연결되어 있는 힘을 이용하는 만큼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고 대우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힘을 과시하고 내세우며 상대를 제압하려고 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힘은 세상의 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힘이다. 아니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 하늘나라의 힘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것을 힘으로 여기고 좇는 성도인가?

본 서신의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 마치 구약 시대에 기록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표현을 언약적 입장에서 이해하자면,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의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그것은 끝난 것이거나 무효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는 박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흩어져 있다. 그래도 교회는 하나이다. 주님의 몸으로써 하나인 교회가 어떤 모습인가? 야고보는 본서를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내 형제들아!”라는 말은 야고보가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표현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읽는 우리들이 야고보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면 우리 역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이다.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정하는가? 그것도 주님께 도움이 되는 종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인정할 수 있다면 야고보서를 계속 읽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시험이란 시련이라는 의미로 고난으로 말미암는 시험을 말한다. 고난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기쁘게 받는 자가 성도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 시험을 기쁘게 받으므로 인내가 생기게 되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통해 성도로서 온전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 자신의 인내를 드러내고 자신의 온전함을 자랑하라는 말씀은 아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믿음이 그렇게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온전함’, ‘구비함’ ‘부족함이 없음이라고 같은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여 완전함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 자신의 믿음 또한 주로 말미암아 친히 주어진 믿음이 어떤 효과를 내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신 주님의 목표이다.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앞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듯이 여기서 말하는 지혜역시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다. 고난으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을 때에 성도가 구해야 할 것은 지혜이다. 고난에 대한 해결책을 세상으로부터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는 자가 성도다.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후에 야고보는 3:13-18에서 지혜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게 되겠지만 여기서 우선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된 지혜가 있는가 하면 선한 열매를 맺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땅의 지혜는 거짓된 지혜이다. 하늘로부터 온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에 온전한 지혜란 곧 예수님이시다(11:19). 그러므로 예수님이 고난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이기는 방법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지혜를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것을 받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17:24-25)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인식에는 교회에 나오면 많은 것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일헌금,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절기헌금, 선교헌금 등 많은 종류의 헌금이 있다는 것으로그래서 하나님은 돈을 좋아한다고 비꼬아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많이 바쳐야 한다는 선입관이 들도록 헌금 강요를 한 교회가 문제다. 하나님은 돈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은혜로 베푸시는 분이다.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믿음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12:2). 의심이란 두 마음을 품는 것과 같다(8). 그러므로 의심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상태에 있을 때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하였다. 바다 물결에 요동한다는 것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흔들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적 요인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뿐이다.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야고보는 이제 세 번째 주제, 즉 빈부의 문제에 대하여 다룬다. 아마도 당시 많은 교회들이 시험의 많은 부분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킨 것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높은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심지어 자랑조차도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가난한 자든 부자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는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늘의 영광을 얻은 것이기에 높아진 것이고, 부자는 하늘의 영광을 받았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상태로 낮아진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나 부자나 다 동일하게 자랑해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땅의 모든 것들은 풀의 꽃과 같이 말라지고 떨어져 없어지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땅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들이다(3:7-9).

세상의 학력, 박사학위, 재산, 부동산, 심지어 교회에서 받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의 직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풀의 꽃과 같이 마르고 떨어져 없어지게 되는 것들이다. 주님 오실 때에 그 앞에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날마다 생각하면서 사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다.

빈부에 대한 문제는 2:1 이하에서 그리고 5:1 이하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2절에서 말하고 있는 시험과 다른 의미에서의 시험이다. 즉 사단으로부터 오는 유혹을 의미한다. 이것을 사단으로부터 오는 유혹으로 본다면 참는다는 표현은 저항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은 사단의 여러 가지 미혹에 대하여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유혹을 이겨내는 자는 그것 자체가 복이다.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들을 이겨내면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로 이미 약속하셨다. 그러기에 사단에 의한 미혹을 저항하는 믿음으로 증명된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을 특별한 하늘의 상급이 따로 있다는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명 그 자체이고 그것이 곧 구원이다. 사단의 미혹을 저항함으로 얻는 영광스러운 구원이기에 면류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시험하신다고 하는 언급들이 자주 발견된다(22:1, 15:25, 8:2, 삼하 24:1, 26:2 ).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자도 미혹에 빠져 계속 죄를 짓도록 조장하시지 않는다. 다만 구약에서 시험을 한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의를 증명하하며 그것을 통해 언약의 본뜻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것을 위해 주시는 시련들을 의미한다.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험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면 사람이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은 자기 욕심 때문이다. 욕심이 없으면 사단의 유혹도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서에서 말씀하는 욕심은 어떤 것인가? 17절에서 갖가지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즉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욕심이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닌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욕심이다.

욕심사망이라는 고리는 서로 사단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시험인내생명이라는 고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는 사랑만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욕심에서는 경쟁이 나오게 되어 있다. 경쟁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자신의 부족함을 만회하고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서로 사랑해야 할 성도끼리 각자의 탐욕에 경쟁의 불을 붙인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던 그 정과 욕심을 다시 살려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욕심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욕심이란 없다. 흔히 목회자가 다른 교회보다 빠르게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것, 성도가 남보다 많은 봉사를 하려고 하는 것 등은 거룩한 욕심이라고 한다.

신앙의 경주는 자신을 부인하기 위한 싸움이요 세상과 세상의 것을 좋아 하는 탐욕과의 투쟁이지 성도끼리 서로를 밟고 죽이기 위한 싸움은 아니다. 그래서 기록자는 16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속이는 것은 사단에게서 분명히 드러나는 특성이다.

17절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온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은사와 선물’, ‘좋다는 것과 온전하다것이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만이 은사이며 선물일 뿐만 아니라 좋은 것이며 온전한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구약적 어법이다(38:7, 136:7, 4:23).

하나님은 빛이시며 빛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회전한다는 말은 변화하거나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로서 그 자신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외부의 어떤 현상들에 의해서도 결코 요동하거나 변화되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기 백성들을 유혹하여 악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며 도리어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속해 내시는 분이다. 그것은 사람의 뜻을 좇아 한 것이 아니다. 변함이 없으시며 외부의 세력에 의해 결코 바뀌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분이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로 자기 백성들을 대속하신 사역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견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선언하고 있다.


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기서 야고보가 뜬금없이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조심해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18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19절 이하의 말씀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과 대조되어 사람의 말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지적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즉 같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자들이라면 진리의 말씀으로 대속의 은혜를 이루신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란 진리의 말씀으로 대속을 이루시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무엇을 하더라도 어떤 말로도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악을 내어 버리고 구원을 이루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말씀을 잘 받으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이미 마음에 심겼다고 표현하고 있다. “란 말씀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미 심겼기 때문에 성도는 계속적으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말씀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22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성도에게 말씀이 심기웠다면 그는 계속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속인다는 것은 마귀적 특성이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곧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쓰고 있다. 거울로 얼굴을 보고 잊어버리는 것은 곧 말씀에 의해 성도가 된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잠시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파악하나 금방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말씀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항상 기억하지 못하는 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항상 말씀을 들여다보고 있고 그 말씀 안에 사는 자는 복 있는 자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에는 반드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야보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말씀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구약적 표현을 차용함으로 말씀을 안다는 것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성경공부 그 자체가 신앙이 아니고,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성도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전부가 아니다. 성도에게는 말씀을 사모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말씀에 굴복되어 말씀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자가 성도이다.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 두 절은 1장에서 논의한 것들에 대한 작은 결론이면서 동시에 2장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당시 종교적 제반 행위들(기도, 금식, 예배 등)을 경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어쩌면 당시에나 오늘날이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행위들을 통해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경건은 말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경건은 헛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은 구약에서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었다(22:21, 5:28, 1:10-17, 5:28, 22:7, 7:10 ). 그것은 언약이 성취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드러났다. 즉 약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신약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을 받은 교회의 모습을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라고 하였다. 즉 성령강림으로 인해 형성된 능력 있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개인 소유를 포기하고 성도들이 함께 물건을 나누어 쓰는 모습이다. 사도행전 4:32-35에서도 유무상통하는 모습이 교회가 능력 있게 세워지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는 교회 공동체가 아무도 가난한 자가 없어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처럼 교회에서 행하는 구제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세상에 구제를 함으로 그 사람을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식으로 하는 복지사업과 엄연히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 말씀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씀은 교회의 본질에 해당되는 일을 교회가 하고 있는가를 묻는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것이 정결한 경건이라고 야고보는 쓰고 있다.

세속이란 성경 다른 곳에서 표현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말과 같은 표현으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항하게 되는 세력을 지칭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세상과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삶은 주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