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2.나훔 1:9-15 아름다운 소식

불편한 진리 2014. 4. 9. 14:12

아름다운 소식
나훔 1:9-15
 


정원에 피어난 아침의 나팔꽃을 보면서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바다의 일출뿐만 아니라 일몰도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가을에 산을 붉게 수놓는 단풍도 우리는 아름답게 느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에 불과합니다. 과연 우리가 아름답게 느끼는 것을 주님께서도 아름답다고 하실까요? 성도는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주님이 느끼는 아름다움에 동참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름답게 느끼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아름답게 보시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평가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10,1218,21,25,3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하루하루 그 날에 지으신 것들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아름다움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만든 모든 만물들이 천지를 창조하고자 하신 본래 취지와 목적에 합당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와를 유혹한 뱀을 저주하는 말씀 속에 주어졌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이 말씀은 뱀과 뱀의 후손, 즉 사탄과 그에 동조하는 모든 세력들과 원수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싸워야 할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의 머리를 밟는 심판이 이루지 않고는 다시 생명의 하나님과 연합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언약에는 심판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심판을 동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사탄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이 시행되는 자리에서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필히 동반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훔서는 1장 초두에서 이미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라고 선언하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2,3절). 여호와는 죄인에게 징계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 하나님이며, 자기를 대적하고 거스르는 자에게 철저히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9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던 자신의 계획에 실패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아직도 예루살렘을 집어삼키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훔 선지자는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답변을 기대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계획에 대하여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무효화시키겠다고 나훔 선지자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계획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갈지라도 하나님이 무효화시키신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상태를 나훔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같이 헝클어졌고 술을 마신 것같이 취한 그들이 마른 지푸라기같이 다 탈 것이어늘”(10절). 가시덤불과 같이 헝클어졌고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멸망시키고 유다에 대하여는 멍에를 풀어주는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2절). 악을 꾀하는 니느웨에 대하여 하나님은 철저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더 이상 괴로움을 주지 아니하고 유다에게 주었던 멍에를 하나님께서 친히 깨뜨리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너의 결박을 끊으리라”(13절).
 
우리는 이러한 심판의 말씀이 단순히 니느웨만을 향해서 선포하는 말씀이고 멍에를 풀어주는 은혜를 베푸는 것을 유다를 향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곤란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니느웨를 통해, 유다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니느웨를 향한 경고는 괜한 경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1-3에서 주신 아브라함의 언약대로 시행하심에 따른 경고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시겠다”고 하신 언약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무조건 은혜로운 하나님으로만 이해하면 언약의 말씀과는 빗나가는 것입니다.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은 은혜을 베푸시는 것 속에 반드시 심판을 동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이스라엘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선포하는 진정한 이스라엘이란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지난주 강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란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즉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가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뜻을 좇는 모습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다도 니느웨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거스르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주신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언약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에게는 보복하시고 죄를 사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언약 안에 있고 언약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이스라엘에게는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에게는 환난 날에 산성이 되어 주십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가 멸망과 두려움의 소식이 아니라 아름다운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 속에는 그리스도라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서 후손이란 갈라디아서 3:1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므로 언약의 실체는 다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문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느냐 하는 문제로 보시는 것입니다. 시편 2:12의 말씀대로 하자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는 자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접하느냐 하는 우리의 행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즉 언약의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스라엘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는 자가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가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대접하느냐 아니면 주님을 반대하고 찌르는 자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그 찌른 자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계 1:7).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 서는데 대하여 예외는 없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소식’은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복음’입니다. 우리가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다시 오실 심판의 날을 예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심판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인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복음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은 자는 심판의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주의 나라에 살게 되는 기쁨의 날입니다. 고생이 끝나는 날이요 행복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실 때에 우리는 그 부름에 순종하며 이 땅에 가졌던 모든 것들을 다 털고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작업이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땅 따먹기를 한참하고 있는데 저녁이 되어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면 모든 것을 다 털고 가야 하듯이 이 땅에서 부동산을 가지고 아웅다웅하다가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언젠가는 이 땅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생명인 줄로 알고 하나라도 모으려고 하지만 주님 편에서 보자면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것을 우리도 아름답게 보아야 하고, 주님이 추한 것으로 보시는 그것을 우리 역시 추한 것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이 주님께는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주님 오실 때에 버려야 할 것이라면 지금 버리는 일에 익숙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주님 앞에 무가치한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아름답게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딱지, 구슬 그러한 것들이 보물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그것을 볼 때에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만 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루신 복음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 전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실 때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땅에서 복을 받고자 하는 욕심으로 드리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애지중지 여기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죄인)가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주님 나라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과정 속에서 주어지는 과정이요 통로입니다. 도구나 통로란 어떤 일의 과정 중에 필요한 것입니다. 일이 목표에 도달하거나 완성된다면 도구나 통로는 불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도구 내지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도나 형식을 율법으로 주셔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보이시기 위한 모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통로를 사용하셔서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셨다면 이제 이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영원히 택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이스라엘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유의해서 구약 성경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은 이 땅에 국가로 존재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행위를 바라보고 주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를 믿게 된 것 자체가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고 그분께 모든 삶의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그분만이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분을 귀하게 여기고 그 아름다운 소식에 자신의 생애를 걸고 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귀중히 여기시는 것은 오직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귀한 것으로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20010905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