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1.나훔 1:1-8 보복하시는 하나님

불편한 진리 2014. 4. 9. 14:07

보복하시는 하나님
나훔 1:1-8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이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 교인들에게 굳어진 교리요 또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잘 몰라도 이러한 구호에 의존하여 스스로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자에 대하여 취소하거나 소멸되는 경우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하신 것에 대하여 결코 취소되거나 소멸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나의 구원이 확실하다거나 취소된다는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아무나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져 그분과 연합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요 또한 그 몸 된 교회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상대하시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지체가 된 자로서 상대하시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을 생각해서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늘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를 짓는 습관으로 살아가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구원하신다는 측면에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통해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나를 바라보면 늘 구원받지 못할 존재로 보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납되어지고 생명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가지는 실수는, 나는 확실히 구원받았다고 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늘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는 입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원수를 이방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훔서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지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순종한 분이고 그분만이 구원받은 존재로 본다면 나는 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해야 할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나훔이라는 선지자는 본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엘고스’ 사람입니다. 지리적으로 엘고스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고고학적으로 굳이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엘고스라는 지명을 밝히고 있고, 엘고스 사람이 남쪽 유다의 선지자로 활동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미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주전 722년), 남쪽 유다의 요시야 왕(주전 640-609년) 때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1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라고 하였습니다. 나훔 선지자가 이렇게 외치게 된 때는 요나가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한 후 약 100-150년 정도의 기간이 지난 상황입니다. 그러기에 이 선지서를 보면서 ‘과거에 요나 선지자 때에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긍휼을 베푸셨더니 이제야 니느웨를 드디어 심판하시는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본 선지서는 일차적으로 나훔 선지자가 주로 활동하면서 말씀을 선포한 대상인 유다 백성들이 읽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 사람(앗수르인)들의 악함을 묘사함으로써 예언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언급함으로써 시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훔 선지자가 처음부터 선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진리 앞에 인간은 누구도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훔 선지자를 통해 처음부터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선포하게 하심으로 니느웨만 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훔 선지자가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2,3a).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보복하시고 진노하시되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에 대하여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적이 누구란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적으로 삼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적은 니느웨도 아니고 유다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니느웨든 유다든 상관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모든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보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적이라면 무엇을 거스른다는 것입니까? 거스르는 기준을 무엇으로 보신다는 것입니까?
 
그 기준을 2절 초두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투기하시며 보복하신다는 표현이 어디에서 인상적으로 쓰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말씀 속에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즉 십계명에서 두 번째 계명에 나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형상이든지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거나 섬기는 자들이 있다면 철저히 그 죄에 대하여 보복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4절에 보면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꾸짖어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홍해를 가르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요단강을 가르신 것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모세를 통해 주신 언약의 말씀을 가지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면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건져 주시고 언약을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언약은 피의 언약이었습니다. 희생 제사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은 누군가 이 땅에 와서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 자신이 피를 흘리는 희생을 통해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내 산에서 주신 모든 제도나 절기들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함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드러내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했습니다. 애굽에서 애굽을 섬기며 종노릇하는 존재는 이미 홍해에서 그리고 요단강에서 다 죽고 없어졌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해 새롭게 된 자는 오직 하나님의 희생의 피를 드러내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의 땅에 살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언약의 땅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고 언약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모든 자들을 대적하는 자로 보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입니까? 유다든 앗수르(니느웨) 백성이든 상관없이 언약의 말씀에 벗어난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말씀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그 언약의 말씀은 유효한 것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하나님을 보복하시고 진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약에 근거해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시되 지금 오신다고 나훔 선지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금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중동 지방에서 어떤 마을에 손님이 온다면 약대나 말을 끌고 오기 때문에 모래 먼지가 일어나는 것으로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손님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그것을 연상해서 하나님의 오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이 지금 오시고 계시고 심판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심판이 아닙니다.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오르는도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5,6절). 또 8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범람한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단순히 몇 사람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를 뒤흔드는 심판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진노와 보복 앞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진노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자가 과연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제외 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어떤 자입니까? 나훔 선지자는 그것을 7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이 아시는 자는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면 심판을 면할 수 있겠구나 우리가 여호와를 의뢰하자!’라고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여호와를 의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여호와를 의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죄로 말미암아 자기를 의뢰하고 자기를 믿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불안감으로 자기 자신도 의뢰하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신을 믿어서 자신을 강화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다고 할지라도 여하튼 인간은 자기를 의지하고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를 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여호와를 의뢰하였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하신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것까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의뢰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언약에 자신을 맡기셨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되는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고린도후서 1:20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되고 옳다고 인정되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나훔서 본문에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들’이란 단순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 안에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이 나훔서를 읽는 유다 백성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고 언약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십자가 은혜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은혜는 결코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게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그 은혜는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뢰하도록 만드는 은혜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에 나는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에 떨면서 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나를 향해서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음을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나를 향한 관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관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고자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진노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도로 하여금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구호 때문에 혹시 교인들이 신앙에 열심을 가지지 않을까봐서 온갖 종교 행위로 교회에 묶어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갖 프로그램들을 만듭니다. 자신을 자랑거리로 삼는 예배당 건축, 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 내가 다니는 교회를 키우기 위한 사람 채우기 식의 전도, 하늘의 상급을 많기 쌓기 위한 봉사와 헌신, 목사의 제자로 만드는 제자 훈련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열매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무엇을 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고 신앙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해도 세상의 것에 가치는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는 자는 주와 더불어 세상에서 죽어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의 모습입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