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인간과 주님

인간의 상급 주님의 상급

불편한 진리 2009. 2. 14. 09:55

인간의 상급 주님의 상급

 

버스나 전철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가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기분이 좋다가도 이내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을 느낀다. 왜일까? 그 노약자가 자리에 앉으면서 내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했다면 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왜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하다못해 고맙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할까?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런 마음이 있다. 소위 말하는 보상 심리이다. 이런 마음은 어디에 연유하고 있는 것일까?

창세기에 보니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제안한 것이 있었다. 즉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어긴 것에 대한 대가가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마귀의 유혹은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으로 보상받았다. 이제 인간은 누구나 다 신이 되었다.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를 내세우는 것으로 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도 에덴에서와 동일하게 악마의 유혹은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해준다는 유혹으로 끊임없이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다. 아니 그러한 제안을 가지고 인간을 자기 수하에 묶어 놓고 있는 것이 악의 실체요 곧 마귀의 권세다. 그러기에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바로 마귀의 권세에 매여있다는 증거이다.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다 이러한 보상심리를 가지고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를 계산하는 존재로 되었다. 항상 이러한 타협과 흥정 속에 자신을 맡겨놓고 있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판단은 굳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 유익만 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본성 아래에 있는 인간의 욕심이다.

그 욕심 때문에 인간은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끊임없이 자신은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가지고 있는 것에서 더 가졌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에게는 늘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한 욕구는 구원에 대한 욕구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전 3:11). 구원에 대한 욕구가 없는 자가 누가 있는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방향으로 나갔던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지 못했다는 실의에 빠져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신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내심 구원을 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줄 새로운 종교를 찾고 있다. 그러나 종교를 찾으면 찾을수록 그 종교 안에서 자신이 신으로 군림할 뿐만 아니라 더욱 공고히 할뿐이다. 죄의 본성 때문이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이러한 죄의 본성이 바뀌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이러한 죄의 본성과 우리의 생각과 행위에 대하여 늘 폭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불신자더러 하신 말씀이 아니다. 여전히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골로새서 3:5의 문맥을 보면,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우상과는 담쌓았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 우상은 섬기지 않는다는 자기 기만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래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고 했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했다. 예수 믿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일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러한 인간의 욕심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 믿게 되면서 욕심이 아무 문제가 안되는 것으로 말한다. 소위 말하는 거룩한(?) 욕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빼앗아 와서 우리 교회를 채우는 것은 아무 죄가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 번 정한 교회는 평생 자기 교회라야 한다는 식이다.

일평생 죽기 전에 큰 예배당을 한번 건축해야 하겠다는 심보나, 교인들을 많이 모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식의 목회자 욕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비전으로 둔갑한다. 그 일에 반대하고 나서는 자는 언제든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가 된다. 그래서 거기에는 주의 이름으로 온갖 저주와 독설이 퍼부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저주하지 않는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 모든 것들이 구원에 대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결과이다. 누가 구원을 받으라고 했는가? 성경 어디에도 구원을 받고 싶은 자에게 구원을 준다고 한 적이 있는가? 천국이란 인간들이 함부러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다. 천국이란 천국의 주인이 따로 존재하신다. 그분이 넣어주는 자에 한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다시는 에덴 동산에서와 같은 배반이 없어야 하는 나라이기에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만 넣어주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제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천국이기에 부단히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자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이것을 받아들여서 방법론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방법,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 십자가를 지는 방법 등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구원을 마음껏 나누어주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이다. 그래서 온갖 프로그램들이 교회에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 읽기나 쓰기, 기도 프로그램 등 모든 종교적 활동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구원을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시도에서 나온 것들이다. 한 마디로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무시하는 내용들이고 하나님의 은혜성을 거부하는 태도들이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흔히 말하는 “포도원 품꾼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이른 아침에 주인이 나가서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서 일하게 했다. 제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3절)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포도원에서 일하게 했다. 제육시와 제구시도 그렇게 했다. 제십일시에도 나가보니 사람들이 있어서 주인이 이렇게 묻는다.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섰느뇨?”라고 물었다. 그들의 대답이 이러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에서 일하게 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포도원에서 일하는 품꾼들은 인력 시장에서 놀고 있을 뻔했던 자들이었다. 주인의 배려에 의해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온 일군부터 한 데나리온씩 지급되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먼저 온 자의 마음은 동요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아침 일찍부터 일한 자신들에게는 더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주는 일의 삯은 한 시간 일한 자나 아침 일찍부터 일한 자에게나 동일하게 주는 것이었다. 먼저 와서 일한 자는 화가 나서 원망하는 말로 주인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절). 많이 수고한 것이 있는데 그에 대한 충분한 대가가 치뤄지지 않은 데 대하여 화가 난 것이다.

일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는 없었다. 적어도 일하는 데까지는 기쁨이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삯을 배당 받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기쁨이 사라지고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자기가 일한 대가만큼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은혜성을 무시하는 것이 죄악된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원수로 삼고 있기 때문에(롬 5:10, 8:7) 원수가 베푸는 은혜는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19장에 의하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16절). 그러자 예수님은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21절). 그 결과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진술해 주고 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절).

이 광경을 본 베드로는 그러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은 자에게는 어떤 보상이 있을 것인가가 궁금했다. 그래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이런 물음 때문에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것이 곧 20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이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예수님이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상 심리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은혜성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자와 같은 마음, 즉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주제넘게 묻는 구원의 욕심을 주님으로부터 공격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우리의 세상적 욕심으로 지적받고 공격받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은 주님의 은혜를 무시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주님의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구제나 선교를 하는 일에 얼마의 헌금으로라도 동참했다면 더욱 뿌듯한 마음으로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에 사로잡힌다. 혹시 하늘 나라에서 상급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왜 이런 염려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늘 나라에 상급이 있지만 그 상급은 일한 것에 따라 상의 차등이 있듯이 하늘 나라에서도 상급의 차등이 있다고 하는 헛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그 다음에 혹시 교회에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에 봉사하는 일에 등한시하지 않을까 하는 목회적 염려에서 구상되어진 발상이 상급차등론이리라.

어릴 때에 “이신득의”(以信得義), “이행득상”(以行得賞)이라고 뜻도 모르면서 외웠던 기억이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행함으로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따지는 것은 이미 확정된 교리에 대한 도전이고 교회의 전통에 대한 반란이라고 믿고 있다. 어쩌면 한국 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처음 교회에 나와서 성경을 펼치기도 전에 이러한 전통적 교리에 대하여 세뇌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성경에서 상과 상급에 대한 말씀들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상급이라는 용어만 가지고 하늘에서의 상급이 차등이 있으니 상급을 받기 위하여 예수 믿은 이후에는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또 다시 인간을 차등화하여 보는 세상적 관념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하늘의 구원을 인간의 행위에다 팔아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결코 성경에서는 상과 상급을 둘로 나누어서 보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급의 차등을 두어서 말씀하고 있지 않다. 이것을 하나로 말씀하고 있지 결코 둘로, 셋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15:1에 보면,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돌라오멜과 연합한 세 족속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잡아가게 되자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른 종들을 군사로 이끌고 가서 네 족속이 연합한 나라를 쳐부수고 돌아왔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을 맞으러 나온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준 것은 아브라함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해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돔 왕이 사람은 자신에게 돌리고 물품은 전부 아브라함이 취하도록 제의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이것을 거절하였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 자신이 모든 것을 치부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북쪽 네 연합군을 쳐부순 것으로 주위의 족속들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 자신이 방패가 되신다는 것이고 전리품을 하나도 취하지 아니한 것에 대해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상급이 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상급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것은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의가 되는 것이었다(창 15:6). 아니 여호와 하나님의 의 안에 있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상급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전리품을 취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쟁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 소중한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고자 하신 상급은 하나님 자신이 언약의 실체로 이 땅에 오시는 것이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사 40:10)라고 했다. 따라서 상이란 보응과 함께 등장한다. 한 편에 보응이 주어진다면 또 다른 한 편에는 상급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창세기 3:15에서 약속하신 뱀의 머리를 밟는 전쟁을 하실 때에 한 편에는 상급을 주시는 동시에 한 편에는 보응을 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막 1:15)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다는 것은 세상을 부정하고 불로써 심판하는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누가 상 받는 자이고 누가 보응을 받는 자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라고 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고 하셨다.

신약에서 상이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을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마 10:40-42).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외에 상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상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을 영접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상으로 받아 그분 안에서 은혜의 삶을 누리게 된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은혜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포도원 품꾼들이 자신의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정당하게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살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는 데 대하여 동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로마서 8:32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없이 하나님을 향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받은 은사를 자랑함으로 자신을 대단하게 내세우는 곳이 교회인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한 은사를 많이 받아 저마다 자랑하고 있다. 자기 것이 더욱 대단한 능력이라고…

그러나 로마서의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은사를 주시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달라는 대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더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본문의 뜻은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줄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주셨는데 우리가 그분 외에 다른 구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 8:34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없다는 뜻이다. 주님이 알아서 다 구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구하시는 대로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구하시는 것은 주님 자신을 상급으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다른 무엇을 주실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직 주님 자신을 상급으로 받지 못한 증거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구원이나 영생을 성경에서는 상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보상 심리를 공격하면서 주어지는 복음의 속성 때문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제안하는 악마의 유혹을 완전히 거절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복음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우리 자신 안에 담으려고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6:1-4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바리새인에게 자기 상이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공개적으로 드러나기를 원했으니까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었으므로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상급이란, 자기 자신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데 있다. 아니 자신의 흔적과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 자신의 상급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랑거리 때문에 일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맛에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오니 교회도 역시 세상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으신다고 했다(롬 2:11). 그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선택 작업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엡 1:4,5).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의 행위를 발판으로 삼는 모든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 다시 말해서 상급의 차등이란 있을 수가 없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상이나 상급이란 없다. 다만 주님이 주시는 상이나 상급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 자신의 언약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다. 자신의 공로를 의로 여기는 그것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의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란 주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 영생이 상급인줄로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그분만을 증거하는 자다. 그가 곧 성도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인간이 기대하는 상급이 없다고 했을 때 이 때까지 교회에서 자신이 열심을 내고 봉사한 것에 대하여 아까운 마음이 들며 모든 자신의 공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듯한 마음이 들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인다면 그 사람은 성도이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고 이제까지 자신이 행한 공로만 떠오르면서 아까운 마음이 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성도가 아닌 것이다.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은 인간의 상급에 매여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