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인간과 주님

인간의 나라 주님의 나라

불편한 진리 2008. 7. 3. 16:10

인간의 나라 주님의 나라

 

많은 교회들의 주보를 보면 기도 제목이 실려 있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나라를 위한 기도 제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올림픽 경기, 월드컵 축구, 아시안 게임 등 국제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국가에 아부라도 하듯이 구체적인 기도 제목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한 기도 제목이 과연 성경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는 데 문제를 삼는 자가 있다면 애국자가 아니라고 할까봐서 그런가? 아니면 목회자의 목회 방침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아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일까?

요한복음 18:3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 앞에 심문을 받으시는 입장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런 말씀을 교인들은 어떻게 이해할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의 나라와 대립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나라와 적당히 협조하면서 상부상조하면서 공존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한 마디로 성경에는 주님의 나라만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의 나라를 인정하신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나라를 거부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존재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적을 통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이런 점에서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무관하지 않다. 마태복음 28:18-20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언이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동시에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늘의 보좌에 계시지만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과 항상 함께 거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이다. 단순히 성도들과 함께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나라를 무산시키고 주님의 나라가 되게 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나라와 주님의 나라는 서로 대립되어 있다. 주님의 나라를 세상의 나라와 무관하지 않지만 두 나라가 언제까지나 공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와 있다. 아니 주님의 나라에 의해 이 땅의 나라는 반드시 멸망 받도록 되어 있다(계 12:9-12, 17:15-17).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소돔과 같고 애굽과 같은 나라, 바벨론과 같은 인간의 나라는 짐승의 나라요 곧 용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짐승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거기에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서게 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선언이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구약을 확인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다니엘 2:44에 보면 이런 예언이 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이 말씀은 단순히 느부갓네살이 다스리는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쳐서 없애고 영원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 예언이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 나라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을 멸하고 오직 주님의 나라만 영원토록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둔 유월절 만찬에서 유월절 포도주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다시 떡과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 22:20)이라고 하셨다. 즉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단순한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으로 약속을 성취하는 대속의 죽음이라는 차원에서 새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었고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리에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졌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곳으로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주님 나라의 원리와 원칙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나라를 무조건 거부하고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모든 삶의 중심과 원리와 법칙이 주님의 나라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세상의 나라와 연대감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적극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적당히 연합하고 타협하면서 살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의 나라, 자기 자신만 존재하는 독립된 나라를 세우라는 마귀의 유혹에 빠진 결과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기 나라를 구축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죄인이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는 죄를 더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흔히 교회에서는 기독교인이 국가에 대한 납세의 의무도 충실히 이행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그 근거는 마태복음 22:21 말씀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도 성실히 수행해야 하고 하나님께도 헌금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의 말씀이 아니다.

마태복음 22:16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헤롯 당원’이라고 하는 자들은 헤롯왕을 인정하고 헤롯왕으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특권과 혜택을 누리는 자들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황제(가이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로마의 황제를 자기들의 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들의 사상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상이다. 결단코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연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 나라이다. 헤롯 당원의 입장에서는 정부에 세금을 바쳐야 할 것은 바쳐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고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정부에 세금을 거부함으로 선지자 노릇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퇴양난에 처하신 것 같아 보인다.

헤롯 당원과 바리새인이 연합한 세상 나라에 의해 올무가 쳐진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세금을 바치는 셋돈을 하나 가져 오라”고 말씀 하셨다. 누군가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다. 당시에 세금을 내는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있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동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조차 싫어하였다고 한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다.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의 답변이 주어진다 :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은 ‘너희들이 이 동전에 있는 가이사의 형상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그러나 너희들은 가이사의 정부에 속해있는 사람들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냐? 너희들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 당연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인 너희들은 혼신을 다하여서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좀더 넓은 문맥에서 살펴보면 마태복음 22:37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우리 목숨의 부분을 바치고, 온 힘의 부분을 바치고 나머지는 국가를 위하여서 힘을 쓰고 목숨을 바쳐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진의(眞意)는 로마의 황제 앞에 드릴만한 것은 드리고, 하나님께 드릴 것은 반이든지 십분의 일이든지 나누어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전적인 헌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의도하신 강조점은 가이사라는 전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후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주신 그것이 생명에 관한 문제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세상 정부를 무조건 거부하고 세상과 등지고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과연 우리의 삶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진정한 섬김의 대상이 누구신가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 자신이 이 일 때문에 오셨고, 이 일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에 전적으로 목숨 바쳐 헌신을 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인간의 나라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욕심이고 우리들의 죄이다. 우리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된 사건,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 되게 하신 것이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이런 점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는 로마서 13:1 말씀이나 왕을 공경하라는 베드로전서 2:17 말씀들은 이 나라를 생각하고 애국심을 기르며 이 정부가 잘 되도록 기도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성도가 세상의 권력을 통해 그 권력 너머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을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인정하고 그 앞에 굴복하라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이 땅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거나 이 땅의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함으로 주님의 나라를 훼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나라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주님의 나라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오직 주님의 나라에만 관심 가졌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