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jSei6kFXqkM?si=Bkcgf0c49i16XBFO
마태복음 강론 54
마태복음 9:18-26
구원하는 믿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는 것을 통해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나타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죄 문제를 다루며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밝히셨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이라는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먹고 행하는 것은 옛것, 낡은 것이며 그것으로 결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예수님 자신이 새것으로 죄인들을 불러 새것에 속하도록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셨음을 나타내셨다.
본문에는 두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12년을 혈루증으로 고통받은 여인을 고치신 이적과 한 관리의 딸을 살리신 이적이다. 이 두 이적을 따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서에서 모두 연결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 이적을 통해 계시하실 뜻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이 두 이적을 따로 나누어서 볼 것이 아니라 함께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가복음 5:21-43, 누가복음 8:40-56에서는 상세히 기록하였으나 마태복음의 본문은 많이 압축되어 있다.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18-19절). 마태는 “한 관리”(18절)로 소개하지만 마가와 누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라고 밝힌다(막 5:22, 눅 8:41). 또한 마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18절)라고 하였으나, 마가는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막 5:23)라고 하였고, 누가는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눅 8:42)라고 하였다. 아마도 딸이 죽기 전에 야이로가 예수님을 향해 갔으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이미 딸이 죽었기에 마태는 결과적인 것을 가지고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20절). “겉옷 가”의 “가”라고 번역된 말은 ‘크라스페톤’으로 ‘(옷의) 가장자리, 옷술, 옷자락, 끝, 한계’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치치트’의 역어이다. 유대인들은 옷술에 말씀을 기록하여 달았다(마 23:5). “만지니”의 ‘하프토마이’는 ‘만지다, 대다, 먹다, 공격하다, 잡다’라는 뜻인데 한마디로 ‘착 달라붙어 하나가 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전 7:1, 고후 6:17, 골 2:21).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막 5:27)라고 하였고 누가는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눅 8:45)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밀려든 상황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할 때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우연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그 능력이 여자에게 나가서 고침을 받은 순서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철저히 예수님께서 의도하시고 만드신 상황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혈루증 여자로 하여금 예수님께 접촉하게 만드시고 다음에 그 여자를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알려주는 구절이 마가복음 5:30에서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라는 말씀이다. 즉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에 능력이 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능력을 내보셨기에 그 능력의 은혜를 여자가 입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단순히 접촉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착 붙어 하나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말씀에 하나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21절). 여자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혈루병이 낫겠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왜 “구원을 받겠다”라고 생각하였을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문제로 이 이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혈루증 여자의 병을 고치는 것을 통해 구원을 말씀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가 원하는 구원이 병을 고치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생각한 것처럼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자에게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능력이 은혜로 주어진 그것을 ‘구원’으로 설명하고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자의 어떤 행동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22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주어진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여인이 만들어낸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믿음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라고 말씀한다. 즉 자기 노력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 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행위를 할 만큼 하였다는 의미이다. 결국 율법적인 행위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옛것이고 새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구원임을 분명히 나타내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여자의 믿음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의한 구원임을 보여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라고 번역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로마서 3:22, 갈라디아서 3:22, 빌립보서 3:9에서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믿음’이고 갈라디아서 2:20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다. 에베소서 3:12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라고 하였는데 여기도 ‘그의 믿음’이고, 데살로니가후서 2:13 “진리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하였는데 ‘진리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14, 3:13, 디모데후서 1:13, 3:15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의 믿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중에 이 상황을 만드셨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야이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말한 것을 보면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18절)라고 하였다. ‘에피티데미’는 ‘에피’(위에)와 ‘티데미’(놓다, 정하다, 고정하다)의 합성어로 ‘두다, 정하다, 놓다, 더하다, 공급하다’라는 뜻인데 성경적 의미로 정의하자면 ‘하늘의 제자리에 정하여 놓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태는 관리로 표현하였지만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회당장이었다. 즉 율법의 문자에 철저히 매여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율법의 문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되어 그의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하늘의 제자리에 정하여 놓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혈루증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접촉하는 것을 통해 그것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여자를 무리 중에 찾아내어 만남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임을 나타내셨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진리가 되는 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란 신을 찾는 것이고 그 신과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이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에 의해 하늘의 제자리에 고정되는 것이다.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23-26절). 예수님께서 아이를 살리실 때 마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막 5:41)이라고 하셨고, 누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눅 8:54)라고 하시니 일어나 걸었다고 기록하지만 마태는 단지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25절)라고만 기록한다. ‘크라테오’는 ‘붙잡다, 체포하다, 굳게 지키다, 정복하다’라는 뜻인데 권능과 능력에 의해 강하게 붙잡아 소유하고 지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여자에게 내보내신 구원의 능력을 여자아이에게도 손을 잡아 내보내시며 강하게 붙잡아 믿음으로 소유하고 지배하신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사실 율법에 의하면 죽은 시체에 접촉하는 것이나 유출병이 있는 자와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말씀하였다. 레위기에 보면 유출병이란 피든지 고름이든지 무엇이든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통칭하고 그것이 부정한 상태라고 하였다(레 15:25-27). 그러므로 유출병이 있는 상태에서는 성적인 접촉을 비롯한 어떤 접촉도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하였다. 접촉되었다면 율법의 규례를 따라 철저히 정결하게 하여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부정한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규례들을 잘 지키면 자신은 정결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율법을 열심히 지켜 영생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가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죽은 상태임을 적나라하게 보이셨지만 그것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자기들이 행하는 금식에 대한 율법 지킴을 자랑하였었다(마 9;14).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과 혈루병자를 동원하셔서 이스라엘의 상태가 어떤지를 다시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이고 ‘열두 살’ 외동딸의 죽음이다(눅 8:42). 성경에서 ‘열 둘’이란 언약의 숫자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12년을 살다 죽은 아이와 12년을 혈루증으로 고통을 받은 여인을 등장시켜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며 저주 아래에서 자기 율법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죽어 있고 부정한 상태임을 고발하신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3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민 5:1-3)
율법에서 말한 그대로 세상에서 버려져 진 밖에 거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혈루증으로 인하여 진 밖에 쫓겨난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저주 아래 있는 상태의 인간은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실로 혈루증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많은 의사에게서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을 다 허비하였지만 병은 더 심해진 상태였다. 진짜 의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고쳐 주셨다는 것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을 불러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신이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유출병을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한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는 뜻이다. 결국 인간이 저주 아래에서 부정한 상태로 만지는 것이나 흘리는 것이나 전해주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부정한 것들이다. 이것이 죄의 권세에 매여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율법에서 피를 구분하여 말씀하신 것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 9:22).
하나님은 유출병이라는 것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시는 자기 피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주시는 피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안에서만 확인된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이루셨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연합되어 하늘에 고정되어 제대로 놓여져야 그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다(2026051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 신약강론 >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53. 마태복음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0) | 2026.04.12 |
|---|---|
| 52. 마태복음 9:9-13 세리 마태 (0) | 2026.03.22 |
| 51. 마태복음 9:1-8 죄를 사하는 권능 (1) | 2026.02.22 |
| 50. 마태복음 8:28-34 가라 (1) | 2025.12.14 |
| 49. 마태복음 8:23-27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1) | 2025.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