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49. 마태복음 8:23-27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불편한 진리 2025. 11. 1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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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49

마태복음 8:23-27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질병과 가난, 고통당하는 것에서 다 고쳐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라는 말씀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우리의 무능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자기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무리를 피해 떠나셨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으로 죽은 자이기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 그 누구도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적을 행하셨다. 그렇다면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이적이 어떤 의미로 나타내셨는가를 알 수 있다.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23-24절). 배에 오르실 때 제자들이 따랐는데 풍랑이 생겨 위험을 맞이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24절)라고 하셨다.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24절)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모르고 주무신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무셨다는 것은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보여 주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배를 타고 가면서 보여 주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제자들과 배에 올랐고 예수님은 주무셨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난다. 풍랑이 생겨 예수님과 함께 탄 제자들에게 위기가 왔다. 본 이적은 마가복음 4:35-41과 누가복음 8:22-25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 보면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눅 8:23)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상황에 “마침” 풍랑이 있었다. 즉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이다. 이런 점에서 풍랑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사 51:15)

 

다는 아니지만 제자들 중의 몇은 어부였고 바다에서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경험으로 풍랑에 대처해 보려고 시도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 4:37)라고 하였고, 누가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눅 8:23)라고 표현하였다.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이것이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절). 예수님을 깨워야 하였고 구원해 달라는 호소를 하는 것이었다.

풍랑과 같은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경험을 근거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수를 믿는 것도 스스로 해결하는 일에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종교에 몰입한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풍랑에 대하여 제자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통해 한계를 지닌 죄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알량한 경험이 우리의 죄악이고, 자기중심적 사고가 죄성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배에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무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셨다. 결국 예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이 어떤가를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호소한 이 말은 천국을 소망하는 구원을 말한 것이 아니라 풍랑으로 인한 어려움, 임박한 죽음에서 살려 달라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가는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라고 하였고, 누가는 “우리가 죽겠나이다”(눅 8:24)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26절). 마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기록하였는데 마가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라고 하였고, 누가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5)라고 말씀한다. 믿음은 크고 작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있고 없고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작다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뜻이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분이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6-10)

 

하나님은 윗물과 아랫물로 나누시고 아랫물을 “바다”라고 칭하셨다. 이런 점에서 풍랑이 있는 바다란 아랫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대적자의 모습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꾸짖고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는 실질적인 세력자에 대하여 꾸짖고 책망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저주 아래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제적인 악의 세력을 제압하신 권세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의해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7절).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다른 배들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는 자연, 즉 바람이나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러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시 72:8)

 

8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9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시 89:8-9)

 

바다의 폭풍은 죄의 권세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마귀에게 바람을 내리시고 바다의 경계도 정하신 하나님께서(욥 38:8-11) 잠시 허용하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순종”이란 ‘휘파쿠오’는 ‘말을 듣다’라는 뜻인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이적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시며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폭로하신 후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셨다. 결국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고 선언한다.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1-23)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5-18)

 

“만물”이란 ‘파스’로 ‘모든 것’이라는 뜻인데 그것을 “모든 피조물”이라고 하였으니 모든 피조물은 창세기 1:2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만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만물”의 ‘차바’는 ‘군대, 무리’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구약에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사 29:6)이라는 “만군의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죄악상의 한계를 폭로하시고 심판하시며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들, 군대의 구원을 이루셨다. 이것을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셨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였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하나님의 창조에서 “태초”(창 1:1)의 ‘베레쉬트’는 ‘머리’라는 뜻을 지닌 ‘로쉬’에서 온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오심’이라는 것을 계시하는 것이었고 그 창조 언약의 말씀대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셨다. 결국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물음은 만물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청빈하게 살았고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청빈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그 누구나 어디에도 머리 둘 곳이 없으셨기에 친히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영을 넘겨주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머리를 두셨다. 그들이 바로 교회이다. 아랫물에 속한 인간은 풍랑을 다스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아랫물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신 것으로 끝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는 대속의 죽음을 이루셨다. 그것이 언약의 온전한 성취였다. 그 성취를 요한 사도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2-14)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202511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49.0823-27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202511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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