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53. 마태복음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불편한 진리 2026. 4. 1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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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53

마태복음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을 통해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드러내셨다. 그러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죄 아래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죽은 존재임을 중풍병자를 통해 이미 보여 주셨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당시 모든 사람이 죄인의 대표상이라고 여기는 세리 마태를 찾아가셔서 부르심으로 죄인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문자의 율법에 사로잡혀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생명의 주를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율법으로 예수님을 공격한다. 본문의 병행구절은 마가복음 2:18-22, 누가복음 5:33-39이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4절). “그 때에”라는 표현은 마태가 의도적으로 앞의 문장과 연결하여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즉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절)라는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본문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묻는 것으로 나오지만 복음서들을 종합해서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와 식사를 나눈 날이 아마도 바리새인들의 금식일이었고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의 금식 규례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2:18, 눅 5:33). 이는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동일하게 율법에 매여 율법적인 시각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율법에서 명백하게 금식을 말씀한 경우는 7월 10일 대속죄일 하루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멸망 과정에서 시드기야 9년 10월 11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11년 4월 9일에 성이 함락되었다. 느부갓네살 19년 5월 7일에는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귀족의 집들을 불사르고 성벽을 다 헐었다(왕하 25:1-12). 7월에는 바벨론 왕이 세운 총독 그달랴를 왕족 이스마엘이 살해하니 유다 땅에 남아 있던 백성들이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예레미야를 강제로 애굽으로 끌고 갔으며 이로 인하여 유다 백성은 약속의 땅을 떠나 다 흩어졌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슥 8:19)라고 스가랴 선지자가 외친 것은 이스라엘 멸망의 역사를 기억하고 슬퍼하며 지킨 금식 절기였다. 이후 유대인들은 이런 금식 관행을 계속 지켰고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레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의례적으로 지켰다(눅 18:1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이런 것이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먹을 것을 안 먹고 자제하는 금식이라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금식함으로 먹을 것을 안 먹는 금욕 생활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먹는 음식을 자제하고 안 먹었지만 사실은 율법을 먹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절). “손님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휘오스’의 복수형으로 ‘휘오이’, 즉 ‘아들들’이다. 단순히 손님이 아니라 가족으로 잔치에 참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잔치집의 아들들은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괴롭게 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들려 올라가시는 날이 오면 금식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지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먹을 것을 먹는 저희들은 나중에 먹지 말아야 할 것, 즉 십자가로 율법을 완성하시게 되면 먹지 말아야 할 율법은 안 먹어도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상태로 천국 잔치에 참여된 자는 율법을 안 먹어도 살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금식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선포하였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기뻐하는”의 ‘바하르’는 ‘선택하다, 결정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가 선택한 금식’에 대하여 말씀한 것이다(바른성경은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또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금식은 무조건 굶는 것이 아니라 참된 양식을 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예수님은 친히 참된 양식으로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는 자는 더 이상 세상의 음식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금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자기 신앙을 표현하려는 것은 문자의 율법에 갇힌 자기 종교성에 불과한 것이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27, 53-57)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16절). “생베 조각”의 “생”은 ‘아그나포스’로 ‘손질하지 않은’이라는 뜻이고, “베”는 ‘라코스’로 ‘천 조각’이라는 뜻이며, “조각”의 ‘에피블레마’는 ‘어떤 위에 던져지는 것, 덧붙이는 것’이라는 뜻이다. “낡은”의 ‘팔라이오스’는 ‘반복하여 사용한 낡은 것’을 의미한다. “기운 것”의 ‘플레로마’는 ‘채우는 것, 충만’이라는 뜻이다. “해어짐”의 ‘스키스마’는 ‘쪼개기, 분열, 잡아 찢기’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난 진리에 그 어떤 문자의 율법을 가지고 반복하여 행한 것으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로 충만하게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율법을 문자로 쪼개고 나누어 나쁜 일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눅 5:36)라고 하였는데 “어울리지 아니하리라”의 ‘우 쉼포네오’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즉 율법의 문자를 반복한 것은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7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사용하는데 대부분 새로운 것은 새로운 형식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수준에서만 머물러 버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말 나타내신 본질적인 뜻을 놓치기 쉽다.

“새 포두주”의 “새”는 ‘네오스’로 단순히 참신한 정도의 새로움이 아니라 기존에 없었던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새것을 의미한다. 누룩을 넣거나 발효되지 않은 ‘물포도주’(우리 성경에는 “물로 된 포도주”로 번역하였다)이다(요 2:9).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피로 상징하는 포도주이다. 여기서도 “낡은”은 ‘팔라이오스’이다. 이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하늘의 것으로 주어져야 하는데 이 땅의 죄인들은 율법을 계속 반복하여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성을 받아주실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그것은 이미 낡은 것, 즉 문자의 율법을 계속 반복하는 종교성에 불과하다.

“쏟아지고”의 ‘엑케오’는 ‘쏟다, 붓다, 피흘리다, 죽이다’라는 뜻이다. 피를 땅에 쏟는다는 것은 저주 아래의 죽음이다. 인간의 피의 유출은 그것 자체로 죽음이다(레 15:25-27). 땅적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버리게 됨이라”의 ‘아폴뤼미’는 ‘멸망시키다, 죽이다, 상실하다, 사라지다’라는 뜻이다. “보전되느니라”의 ‘쉰테레오’는 ‘쉰’(~와 함께)과 ‘테레오’(지키다, 마음에 품고 새기다)의 합성어로 ‘함께 함으로 완성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함께 살아남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금식과 연결하여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금식은 요한의 제자들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하는 육체의 금식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문자의 율법을 반복하여 행하는 낡은 조각, 낡은 부대는 진리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될 때 진정한 금식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성경에서 “가죽 부대”라고 번역하였는데 “부대”의 ‘아스코스’의 어원은 ‘그릇’(헬, ‘스큐오스’)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죄의 권세 아래 매인 인간들의 상태는 곧 진노의 그릇이었다. 즉 낡은 그릇에 담긴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긍휼의 그릇으로 바꿔놓으셨다. 긍휼의 그릇이 곧 보배를 담은 그릇이 된 것이다(고후 4:6-7).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1-24)

 

16절과 17절 말씀은 독립된 구절이 아니라 금식과 관련된 말씀이다. 그렇다면 금식을 자랑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면서 그들의 율법적인 종교 행위가 종교적으로 계속 반복된 것, 낡은 것이라고 폭로하신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당연히 하나님께 속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다.

오늘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이단이었다. 자신의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율법적인 종교 행위를 계속 반복하여 영생을 취하려고 하는 것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새 옷에 속한 것을 옛날 옷에 속하도록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그릇에 담는다면 그릇도 깨어지고 새 포도주도 땅에 쏟아져 버려지게 되므로 그것 자체가 저주의 죽음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행하는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를 부르러 오셨다.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무조건 주님이 나를 찾아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러 눈을 뜨게 된 자가 비로소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의 집에서 그의 친구들을 초청하여 먹고 마시는 잔치를 통해 진정한 금식은 영원한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이 한 집에서 먹고 마시는 연합(레위)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결국 문자에 매여 율법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합류되는 것이 참된 생명이다(202604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53.0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202604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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