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17. 출애굽기 9:1-7 가축의 죽음 이적

불편한 진리 2025. 9. 2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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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17강

출애굽기 9:1-7

가축의 죽음 이적

 

바로는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완악함으로 고수하고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열 이적으로 이끌어 가신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이적의 결론은 바로의 굴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길 자는 없다. 그 결론을 아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라고 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1절). “들어가서”의 ‘보’는 ‘가다, 오다, 거하다, 적용하다, 얻다, 들어가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들어가는 것이니 바로와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는 완악함으로 말씀을 거부하는 존재이기에 모세와 바로는 하나되지 못하고 결국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히브리 사람”이란 ‘죽음을 건너온 자’이다. 출애굽기 3:18, 5:3, 7:16, 9:1, 13, 10:3에서 이적을 나타내시는 동안 내내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이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단순히 이스라엘이 죽음을 건너온 자들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을 건너 “내 백성”으로 만드시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을 건너 세우신 내 교회는 음부의 권세로 무너뜨릴 수 없는 내 백성이 되는 것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2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3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2-3절). “억지로”(2절)의 ‘오드’는 ‘연속, 계속, 아직, 다시’라는 뜻이고, “잡아두면”의 ‘하자크’는 4:21에서 “완악하게”라는 표현과 같다. 완악함을 계속 유지한다는 의미로 바로가 완악한 마음으로 계속 이스라엘을 잡아둔다는 의미이다. 죄성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고집부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믿는 바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가축”(3절)의 ‘미크네’는 ‘카나’(얻다, 취득하다)에서 유래하였는데 ‘가축,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 지방의 유목민들에게 가축은 소유물이었고 재산이었다(창 31:18). 또한 이 단어는 가축의 소유자를 의미하기도 한다(창 46:34, 대하 14:15).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미크네) 더 많이 가졌으며(전 2:7)

 

소유에 대하여 신약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유를 흩어버림을 통해 생명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이 가진 것을 흩으면 생명을 누리고 온전해질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땅의 것,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말한다기보다 이제까지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온대”(마 19:20)라는 예수님 앞에 내어놓은 ‘자기 율법 잘 지킴’이라는 것이 자기 소유이다. 따라서 소유를 판다는 것은 문자적인 율법의 행위를 부인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문자를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짐승, 가축과 같은 겉사람이다.

“심한 돌림병”(3절)이란 문자적으로 ‘매우 무거운 병, 굉장히 두려운 병’이라는 말이다(개역한글에서는 “심한 악질”로 번역하였었다). “돌림병”이라고 번역한 ‘데베르’를 우리 성경 대부분은 “전염병”(민 14:12, 삼하 24:13-15, 대하 7:13, 렘 14:12, 21:7 등)으로 번역하였는데 칼이나 기근과 연결하여 함께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 70인역에서는 ‘다나토스’로 번역하였는데 ‘데베르’는 ‘다바르’(말하다, 정돈하다)에서 온 단어이다. 소유를 완전히 빼앗겨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것을 죽음으로 보여주는 이적이다. 그러니까 굉장히 무거운 병이란 죽이는 표면의 말씀 곧 문자의 율법을 비유하고 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4절). “구별하리니”의 ‘팔라’는 ‘구별하다, 뚜렷하다, 나누다, 명확하다’라는 뜻인데 8:22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완료형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하였다. 하나님 백성으로의 구별과 경건한 자로 택하심을 의미한다. 애굽의 가축(소유)은 겉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스라엘의 가축(소유)은 속사람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자기 언약을 담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은 속사람, 영의 사람이 된 것이다.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의 사람으로 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조 언약 안에서 이렇게 보여주셨다.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하나님께서 먹을거리를 구분하셨다는 것은 이 언약을 통해 나타내실 뜻이 있다는 의미이다. 즉 씨가 없는 풀을 먹는 생물이 땅적 존재인 짐승이다. 그러나 사람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고 말씀한다. 즉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진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첫 사람 아담은 선악의 나무를 취하여 죽음 가운데서 둘째 아담이신 신령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이성 없는 짐승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벧후 2:12)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결국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하늘의 신령한 자가 이성 없는 짐승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언약이 온전히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을 계시하기 위해 하나님은 애굽인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 가운데 언약을 담아 놓고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셨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들추어 내심으로 이스라엘 자체가 메시아가 될 수 없음을 철저히 증명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시는 언약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이성 없는 짐승들에게 죽음으로 완성하신 씨를 먹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바울 사도는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고 선언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선포하였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6-29)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5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6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5-6절). “기한”(5절)이라는 ‘모에드’는 ‘정한 때’라는 뜻이다. “내일”(5절)이란 심히 무거운 병으로 인하여 짐승들이 죽는 죽음의 날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 내일이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이란 오늘 지금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난 은혜의 때이다(고후 6:2).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6절)라는 말씀은 죽음의 재앙과 관계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구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뜻인데 이는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은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심으로 말씀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7절). “본즉”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힌네’는 ‘보라!, 자!’라는 뜻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감탄사로 ‘바로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 일어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죄성이다. 그러기에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신 것을 알지 못하면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죄이고 그 죄가 보이는 것이 은혜이기에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매일매일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202509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출17.0901-07 가축의 죽음 이적(2025092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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