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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13
창세기 43:1-15
요셉과 형들의 만남(4)
비록 야곱은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42:38)라고 말하고 있지만 형제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일이기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베냐민을 애굽에 데리고 가서 정탐꾼이 아니라는 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육적 아들을 내어주고 언약의 아들을 얻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됨이 계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이기에 하나님의 때에 이루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 가나안 땅에 기근을 주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기근을 통해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진리의 양식으로 채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오늘날 언약 백성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된 자들에게도 이렇게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건을 주신다는 것은 먹고 살 수 있는 생존에 대한 목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아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생명을 은혜로 누리게 됨을 아는 것에 있다.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1-2절). “심하고”의 ‘카베드’는 ‘무거운’이라는 뜻이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베냐민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을 상황으로 이끌고 가신다. 기근이 심하여 무겁게 함으로 애굽에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야곱의 가족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양식이다. 이런 점에서 형제들이 요셉에게 양식을 받아와서 먹고는 있지만 마음에는 무거운 짐이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요셉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아직 말씀을 지켜야 하는 명령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근을 통해 진리의 말씀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곡식을 다 먹으매”라는 말의 ‘칼라’는 ‘완성하다, 성취하다, 소모하다, 끝내다, 마치다’라는 뜻인데 우리 성경에는 곡식이 다 소진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되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곡식(히, ‘셰베르’)으로 상징되는 진리의 말씀을 시작하고 성취하시는 준비를 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야곱은 아직 베냐민을 내어놓지 못하는 상태라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라고 “양식”을 ‘오켈’로 표현하였다. 이런 점에서 야곱을 “아버지”로 강조하고 있는데 야곱 중심의 가족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집이요 성전이다(창 28:17-22, 35:7). 따라서 아버지를 중심으로 아들들이 베냐민을 요셉과 만나게 하지 못하는 상태는 문자적 율법에 매인 땅의 성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3-5절).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3, 5절)라는 표현은 요셉을 대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한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만나 자기 율법의 행위를 내세우는 자의 죽음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요셉 안에 언약을 담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라고 하시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친히 가리라”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내 얼굴이 갈 것이라’라는 말이다. 그래서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라고 말씀하시며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라고 하셨다. 결국 요셉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죽음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형제들은 분명 작은 자, 곧 베냐민과 동행하여 다시 요셉과 대면하여야 한다. 그것이 언약으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작은 자로 오셔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길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3절과 5절에서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3절)이라는 표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베냐민과 동행하지 않으면 양식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니 베냐민은 형제들에게 양식을 주는 자가 됨으로 결국 요셉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형제들은 이 일을 통해 철저히 언약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나안 땅의 기근은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이다. 이렇게 아브라함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과히 언약이란 인간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언약이며 철저히 은혜에 기인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6절). 베냐민을 내어주고자 할 때 비로소 성경은 “이스라엘”(6, 8, 11절)이라고 언급한다. 야곱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서 베냐민을 내어놓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아들들이 묻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대답한 잘못을 책망하고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칭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을 다스리시고 그를 통해 언약의 성취자를 계시하시겠다는 의도이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애굽으로의 이주가 사람에 의한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이행하시는 것임을 말씀하고자 하심이다(창 15:13-14).
그러므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라는 말의 히브리어 ‘라아’는 ‘상하게 하다(문자적으로는 산산조각으로 깨뜨림에 의해서), 쓸모없게 하다, 괴롭히다, 나쁜’이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야곱이 베냐민의 일로 인하여 번민과 괴로움 가운데 있다는 말이지만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혈육에 매여 있고 성전 중심의 율법적 행위를 고수하는 야곱이라는 성전을 깨뜨려 이스라엘로 이끌어 가고자 하신다는 표현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7절). 앞의 본문에서 보면 요셉은 이런 물음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요셉에게 가족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혈육에 대한 안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가족이 어떤 상태인가를 드러낸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있다는 것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하여 요셉을 통해 주어지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야 할 형편이 야곱의 가족의 상황이다. 그러기에 형제들은 혈육에 대하여 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8-10절). 르우벤이 두 아들을 담보로 내세운 데 이어 요셉을 팔자고 제안하였던 유다가(창 37:26-27) 희생의 대표자로 나섰다. 자기 자신이 담보가 되었다. 형제들 간의 갈등으로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책임지는 상태, 서로 희생하겠다고 나서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유다의 제안은 도박이 아니라 르우벤의 보증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르우벤이라는 육의 장자의 담보는 그것 자체로 분명하지 않고 유다를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증이 되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르우벤의 육의 담보는 율법을 상징하고 유다의 담보는 그 율법이 보증하는 바가 보여주는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5-4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육의 아담의 보증을 더욱 확고히 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하였다. 그래서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 곧 살아 있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시는 영이 심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된 자는 성령의 보증으로 이 모든 비밀을 알게 된다.
유다의 희생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가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8절)라는 유다의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 하나 된다는 것은 가족이 같은 의견으로 좋은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고자 하시는 몸 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란 단순히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요 14:15-20).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11절)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하여 야곱이라는 땅의 성전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이라고 하였는데 기근의 상태에서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을 하였다는 것은 언약적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예물을 드릴지니”라고 하였는데 “예물”의 ‘민하’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이다. “그릇”의 ‘케리’는 ‘용기, 기구’라는 뜻인데 희생제물을 담는 그릇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담고자 하는 형제들의 마음이다. 결국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언약의 땅의 아름다운 것, 곧 언약의 성취로 보여주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2-14절). 야곱에게 베냐민은 독자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온전히 동참 되는 완성을 드러낸 것과 같이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놓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온전히 동참 되는 완성을 보여준다. 곧 이는 독자의 죽음이다. 즉 언약 안에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성취이다. 그 안에만 생명이 있다.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라는 말씀은 이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잃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14절)(히, ‘엘 샤다이’)이란 자기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15절). 자신을 죽음에 내어놓는 과정을 통해 진리를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야곱과 형제들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희생정신을 담아 놓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성취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다(202504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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