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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10
창세기 42:1-13
요셉과 형들의 만남(1)
41장에서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창 41:56-57)라고 하였다. 기근, 즉 말씀의 기갈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라고 하여 언약의 아들 요셉을 통해 양식이 있게 된 애굽에 관심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이런 점에서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심했다는 것은 언약의 아들 요셉을 통해 나누어지는 말씀을 찾아 야곱의 가족이 요셉을 만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 요셉을 통해 나누어지는 말씀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이다.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근을 허락하신 것이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것, 애굽의 총리가 된 것, 가뭄이 들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가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심이다. 야곱과 그 아들들은 요셉에게 보여주신 말씀을 같이 경험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1 그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1-2절). “그때에”라고 번역한 ‘라아’는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 주시하다,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는 요셉이 총리가 되고 8년이 되던 해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야곱이 애굽에 양식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위해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야곱에게 말씀을 그 마음에 두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창 37:11)
따라서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말씀으로 생명 안에 살아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오직 말씀이 있는 요셉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일지라도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이방에서 객이 되어야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생명은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양식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3-5절). “요셉이 형 열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요셉과 관련된 열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셉의 형들로서 열이라는 온전한 숫자로 내려간다는 것은 언약의 한 아들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말씀한다. 야곱은 하란을 거쳐 벧엘에 오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요셉을 잃은 것 때문에 내적으로는 베냐민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라고 말씀한다. 문자적으로 보면 요셉을 잃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로 보인다.
그러나 말씀이 두 증인을 만나게 되면 열둘이라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열둘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계시하는 것이 요셉과 형들과의 만남이다. 이것이 야곱이 열 명을 한꺼번에 보내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없는 기근의 땅에서 그 하늘의 양식을 얻어 누릴 수 있는 곳에서 그 아들들을 보낼 때 성경은 야곱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언급한다. 즉 야곱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되는 언약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온전한 척하며 율법을 지켜 영생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고 언약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6-7절). “총리”의 ‘샬리트’는 ‘지배하는, 통제하는, 주권자, 통치자’라는 뜻이다. 이제까지 우리 성경에 “총리”(창 41:41, 43)로 번역한 단어는 ‘나탄’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기근의 땅에 말씀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요셉을 총리, 즉 주권자, 통치자라는 의미로 지칭한다.
“곡물”은 ‘오켈’로 ‘음식물, 양식’이라는 뜻이다. 3절에서 형제들이 사고자 하는 “곡식”을 히브리어로는 ‘바르’로 표현하였는데 ‘알곡, (들판에 있는) 곡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1절에서는 “곡식”(을 ‘셰베르’라고 표현하였는데 ‘곡식, 양식, (곡식을 타작하는) 깨뜨림, 파괴’라는 뜻이다. 요셉의 형들은 들판에 있는 ‘바르’라는 양식 (3절)을 깨뜨려 얻는 진짜 양식, ‘셰베르’(1절)를 구하러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구하는 것은 땅의 양식인 ‘오켈’이었다. 이것을 구하기 위해 세상으로 상징되는 애굽에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3절)라고 표현하였는데 ‘야라드’는 ‘내려가다, 내려오다, 내리다’라는 뜻이다. 즉 하늘의 양식을 얻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내려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언약의 아들 요셉을 통해 주시는 하늘의 양식이 있다. 그 진짜 양식은 언약의 아들로서 열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율법의 문자와 행위로 말미암아 쌓여진 ‘자기의’라는 자리에서 내려가야 한다. 자기 의가 없이 하늘의 의를 드러내는 자가 진짜 언약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라고 말씀하여 언약의 말씀을 나누어주는 자가 요셉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의 계시, 즉 말씀이 성취됨을 보여주며 동시에 요셉의 꿈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형제들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없는 애굽의 현인들이나 점술가들과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창 41:8, 24).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창 37:6-7, 9)
따라서 형들은 종의 입장에서 요셉이라는 진리를 주인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계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니 육의 상태에서 하나님 왕국의 주권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형들은 오직 육의 기근에서 살아남는 생존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다. 세상과 같은 애굽이라는 곳에서 언약의 아들이 하늘의 양식을 나누어준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9-14)
“8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8-9절). 요셉이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육의 형제임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일에 형들이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기꺼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되었으나 형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만남의 과정을 통해 형들은 요셉이 겪은 일과 같은 일로 언약의 공동체로 하나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알고 있으나 형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알고 계셨다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4-25)
결국 요셉에게 주어진 꿈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말씀으로 섬기는 언약의 성취로 보여준다. 교회는 열두 아들들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계 21:12)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10-12절). “확실한 자들”이란 말의 ‘켄’은 ‘쿤’(확고하다, 확립하다, 고정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똑바로 세우다, 정당한 옳게’라는 뜻이다. 야곱이 보낸 아들들로서 요셉을 만나 하나가 되어 똑바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이다.
그러나 형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하지도 않아야 할 말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13절)라고까지 말한다. “없어졌나이다”라는 말의 ‘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즉 요셉의 형들에게 요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약의 말씀을 마음에 담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죄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다(롬 1:28). 그 마음을 깨뜨리고 찾아오셔서 새로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새기도록 만드셨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5-10)
(202504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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