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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11
창세기 42:14-25
요셉과 형들의 만남(2)
요셉은 가능한 속히 형제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아버지 야곱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도 요셉이 경험한 언약의 하나님을 알아야 했다. 요셉이 당한만큼 형제들도 당해야 한다는 복수의 차원이 아니라 요셉이 경험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버림의 고난을 체험해야 하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언약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희생정신, 곧 언약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의 가족은 그냥 단순한 한 가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14-15절). “정탐꾼”의 ‘라갈’은 ‘중상하다, 염탐하다, 탐지하다, 찾아내다, 조사하다’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상대를 적으로 보고 염탐을 하는 것인데 요셉이 형제들을 정탐꾼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나라에 속한 존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양식을 나누어주는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진리를 나누어줌으로 생명의 왕국을 보여주는 반면 형제들은 오로지 땅의 양식(히, ‘오켈’)을 돈으로 사서 생존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땅적 나라, 율법의 문자에 매여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나라에 속한 정탐꾼이라는 것이다.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라고 하였는데 “진실함”이라는 표현은 없고 ‘너희를 입증하라’라는 말이다. 즉 그들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것은 베냐민을 데리고 오는 것으로 형제들이 하나 되면 언약 공동체로서 진리로 세워져야만 정탐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다.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라는 말에서 “맹세”라는 단어는 없고 직역하면 ‘바로의 살아 있음’이라는 말인데 현재 바로와 요셉은 하나라는 측면에서 요셉이 언약을 보여주는 자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막내”의 ‘카탄’은 ‘작은, 어린, 하찮은, 중요하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라는 것은 열한 명으로서는 언약의 온전한 성취를 보여줄 수 없다는 뜻이다. 단순히 요셉과 베냐민이 한 어머니 아들로 태어났기에 혈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베냐민과 함께 요셉을 만나야 꿈으로 주신 계시의 말씀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열둘이 하나로 완성되려면 가장 작은 자가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는 모습으로 야곱 언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창 25:23).
작은 자는 ‘오른손의 아들’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베냐민이고, 요셉은 ‘그가 더할 것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요셉으로 말미암아 가장 작은 자가 더해짐으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작은 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를 성취하는 아들로 완성됨을 보여준다.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16-17절). “너희 중 하나”란 열 명의 생각이 하나의 생각으로 드러난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단은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라고 말씀한다. 히브리어로 보면 여기에 ‘감옥’이라는 단어 ‘미쉬마르’가 들어 있는데 번역하면서 삭제되었다. 즉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감옥에 가두었더라’라는 말이다.
“진실”이라는 말의 ‘에메트’는 ‘진리’를 의미한다. “너희 말”이란 ‘다바르’로 요셉을 통해 주어진 말씀이라는 뜻이다. 즉 그들이 함께 옥에 갇혀 같은 진리를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삼 일”을 가두었다는 것은 요셉이 구덩이와 감옥을 통해 죽음을 경험한 것과 같은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삼 일 길이 되는 것이다. 형제들이 감옥에 갇힌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갇힌 것을 계시한다는 뜻이다. 요셉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형제들을 십자가 사건에 동참시키고 있다(갈 6:14).
“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18-19절). 형제들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요셉이 그들에게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라고 말한 것은 형제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죄를 폭로하는 것이다. 요셉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 같이 형제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생명으로 살아나게 된다.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라는 말씀은 한 사람의 희생, 곧 죽음으로 야곱의 집안이 진리의 굶주림에서 구원을 얻는다. 야곱의 집은 비록 언약의 땅인 가나안 땅에 살고 있지만 기근으로 인해 말씀이 없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 집이 하나님의 집으로 살아나는 것은 오직 언약의 말씀이 주어질 때이다. 그것을 죽음을 경험한 언약의 아들 요셉이 진리의 양식을 나누어줌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이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는 언약을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그래서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20절)라는 말씀을 계속 반복하여 강조한다. “진실”이란 말의 ‘아만’은 ‘믿다, 확실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너희의 말”, 곧 ‘다바르’가 믿음이 되고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반복하여 말하자면 베냐민이 열두 아들로 진리를 나누어주는 요셉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열둘이 되어야 그것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그것이 곧 생명이 되는 것이다. 요셉이 하나의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열두 아들이라는 언약의 공동체가 완성되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 왕국이 완성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오셨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21-23절). “범죄하였도다”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동사 ‘아샴’을 쓰지 않고 형용사 ‘아솀’을 썼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지금 형제들은 요셉의 말을 듣고 자신들이 요셉을 죽인 행위가 죄가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상태가 본성적으로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죄악된 어떤 행위를 끊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로 바뀌어 있는가를 말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악의 상태, 땅적 상태에서 의의 상태, 하늘적 상태로 바뀌는 것이라는 뜻이다.
형제들은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애걸한 적이 없다.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질 때도 그랬고, 상인들에게 팔릴 때도 그랬고, 보디발의 감옥에 갇힐 때도 아무런 변명이나 항변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53장에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임을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 사건에 요셉이 당하는 괴로움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자기들이 힘을 가진 존재로 요셉이 애걸하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요셉이 아무 말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약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시 105:16-18).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라고 말한 것은 형제들의 사고방식이 인과응보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일이 현재의 일과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베냐민이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형제들은 요셉이 당했던 육신의 고통, 죽음만 생각하고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하는 괴로움이라는 육신의 일로 걱정한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보자면 모든 일이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동질성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난이다. 그러므로 요셉을 통해 진리를 은혜로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실 르우벤은 요셉을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하였었다(창 37:21-22). 이런 점에서 르우벤은 육신의 장자로서 말하게 된 것인데 일련의 이 과정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되었기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22절)라는 표현은 형제들에 대한 책임 전가를 하는 것처럼 보이나 장자로서 진리를 전한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을 팔았다. 오늘날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고 예수님를 팔고 있다. 육의 예수님이 일으켰던 표적들을 추구하면서 형통과 번영, 축복을 소망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런 모습들이 돈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파는 장사를 하는 것이다.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24-25절). 요셉이 “시므온”을 대표로 감옥에 가두는데 “시므온”은 ‘들음’이라는 뜻이다. 형제들의 귀를 열어 들을 수 있게 해주셔야 한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라고 말씀하여 듣는 것과 보는 것을 암시한다. 즉 그들이 요셉을 통해 주어지는 언약의 말씀을 듣는 것을 위해 시므온을 대표로 감옥에 가두었고 그것을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행함으로 그들이 보는 것이 한 형제가 결박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비진리, 곧 율법의 문자에 매여 있음을 보게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진리로, 보이고 들리는 자가 교회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라는 말씀은 형제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광야 길을 지나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광야에서 먹을 음식을 주는 것이다. 광야는 언약의 성취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광야는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생명으로 사는 양식을 준 것이다(202504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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