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09. 마태복음 4:12-17 흑암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불편한 진리 2024. 2. 1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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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09

마태복음 4:12-17

흑암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4:11에 보면 예수님은 성령께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후에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라고 말씀한다. “천사”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존재이다. 즉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심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심은 십자가에 있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첫발을 내딛으신 것이었고 이제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고 말씀의 성취를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 말씀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준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12-14절). 예수님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시게 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위한 준비 사역자였던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것은 이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던 시대는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 공식적인 일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거나 단순한 일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가버나움을 소개하는데 단순히 가버나움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이라고 하였다. 마태가 가버나움의 위치를 소개하려고 이렇게 구체적인 주변의 지명을 밝혔다기보다 갈릴리 지역, 즉 유대와는 동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방인의 땅과 같은 곳으로 여기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해변 길과 요단 건너 갈릴리 지역은 오래전부터 심판의 고통을 가장 심하게 겪었던 지역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징벌하실 때 주로 이방의 강한 나라들을 불러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는데 이스라엘 북쪽 변방에 위치한 이들 지역은 항상 이런 침략에서 가장 먼저 당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상 이 지역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장 먼저 철저하게 경험한 곳으로 가장 먼저 구원의 빛을 비추실 것이라고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마태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15-16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서의 인용이다. 인용된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1-2)

 

이사야 8장은 앗수르 왕이 유다를 침략할 것이라는 예언을 말씀하면서(사 8:7-8) 유다의 상태를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사 8:21-22)라고 폭로하였다. 즉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굶주리게 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 상태를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상태라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무시하고 배반하는 유다를 앗수르에 넘기심으로 흑암 가운데 들어가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요한이 잡히는 시점을 이용하여 예수님께서 천국을 선포하시는 것이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의 성취라고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취하시는가를 이사야 선지서가 전한 말씀을 좀 더 폭넓게 문맥에서 보아야 한다. 9:3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3-7)

 

하나님께서 유다를 앗수르에 넘기시는 이유는 단순히 언약을 배반하였다는 것에 대한 징벌이나 심판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실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 아기”, “한 아들”의 나심이다. 즉 한 아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 유다를 압제하는 앗수르를 꺾으시고 거기서 구출해 내신다는 것이다. 그 “한 아기, 한 아들”은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할 것이라고 밝히셨다.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라는 표현에서 “정사”라는 말의 ‘미쉬라’는 ‘통치 지배’라는 뜻이고, “메었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야’로 ‘~이 일어나다, ~이 되다, ~이다’라는 뜻이다. 즉 어깨(등)에 있는 지배, 통치로 살아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라고 말씀한다. 즉 한 아들이 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통치하는 그 다스림은 영원무궁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다윗 언약의 회복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유다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포로가 되어 흑암 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유다, 이스라엘이 열심히 행하는 율법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기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다윗 언약의 성취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윗 언약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창 12:1-3)의 연장선상에 있고 또한 아담 언약(창 1:26-28)과 노아의 언약(창 9:7-11) 안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과 9장의 말씀은 흔히 말하듯이 문화명령으로 세상과 땅의 동물들을 예수 믿는 자들이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실체를 보내시면 그가 땅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진리의 말씀으로 땅에 충만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언약을 아브라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큰 민족”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한 “민족”의 히브리어 ‘고이’는 하나의 혈통적인 민족이 아니라 여러 혈통이 포함된 하나의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로 ‘민족, 국가, 국민, 백성’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흑암의 빛이 되시는 말씀을 성취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마태가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내용이 무엇인가?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17절). 공관복음서의 기록을 통해서는 다 알 수 없지만 요한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유대에 잠시 머물러 계셨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주된 관심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데 있다. 결국 이것은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지역 쪽에 포진함으로 기존의 이스라엘을 공격하시는 형태를 취하심으로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방 땅과 같은 갈릴리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종교 중심으로 삼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인간의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으로 나타내시기를 원하셨다.

그러기에 이방인을 들어 유대인들을 죄성을 폭로하고자 한다는 의미를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시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말하는 “천국”(헬, ‘호 바실레이아 호 우라노스’)을 직역하면 ‘그 하늘의 그 왕국’이다. 즉 구약의 어떤 하늘을 지칭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시고 궁창을 “하늘”(창 1:8)이라고 부르신 ‘그 하늘’이다. 밀과 독보리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 인자의 그 왕국’(13:41)이라고 자신을 왕국으로 표현하셨다. 이렇게 보자면 예수님 자신이 하늘의 왕국 곧 천국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실로 하늘 왕국이 이 땅에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란 하늘 왕국이 임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마가의 선언에 따르면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것으로 그것이 곧 복음이며 또한 회개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엡 2:8)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또한 나에게 하늘의 왕국이 임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인가? 대부분 천국,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물으면 쉽게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한다. 그러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없었는가? 하나님의 통치가 있었다면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잘못된 선포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천국을 말씀 안에서 다시 정의하여야 한다.

마태복음 8:11에 보면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천국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세 인물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고 땅의 모든 족속이 이 나라를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포는 그 약속의 성취가 눈 앞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아니 십자가를 지기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확정하셨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천국이란 ‘어떤 특정한 인격체가 이 땅에 와서 그 안으로 자기 백성들을 불러 통치하는 나라’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어 성취하신 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 모아 친히 다스리는 형태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요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라고 명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이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찾아와 거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게 된 일을 두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빌어 표현하되 “흑암에 거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본 것”이라고 하며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 생명의 빛을 비췸을 받게 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적당히 반성하며 삶의 태도를 고치는 회개가 아니며, 세상 삶에 그리스도적 삶을 더 보태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찾아오심에 의해 자신이 흑암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땅적 존재에서 하늘적 존재로 바꾸신 것이다. 이방인인 우리가 내가 십자가의 은혜로…(2024021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09.0412-17 흑암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202402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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