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

58. 요한계시록 15:1-4 주의 의로우신 일

불편한 진리 2023. 11. 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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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58

요한계시록 15:1-4

주의 의로우신 일

 

땅의 곡식 추수와 포도 수확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천국의 아들들로 거두시는가를 나타내신 것이다. 곡식은 떡(빵)을 상징하고 포도는 피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던져 넣으셔서 생명을 허락하신다. 따라서 성 밖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요 성도의 운명이다.

그리고는 이제 15장에 이르러 하늘의 상황을 언급함으로 단순히 땅에서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15장은 16장의 대접 심판의 서론 부분으로 새로운 시작을 계시한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1-4절은 큰 환난에서 승리한 무리의 노래가 언급되고, 5-8절은 하늘 성전의 장면으로 마지막 재앙을 준비하는 일곱 천사의 환상을 그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일곱 번째 나팔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일곱 대접의 심판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는 결코 시간적인 순서로 이러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을 역사적인 시간의 순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여러 종말론적 사건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다방면으로 또한 더욱 구체적으로 반복하여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1-4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종결된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처럼 생각된다. 오히려 5-8절의 두 번째 환상이 시간적으로 보면 첫째 환상을 훨씬 앞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4절의 내용을 먼저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미 성취된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차원이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1절).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이라고 하였는데 ‘다른 크고 놀라운 하늘의 표적’이라는 말이다. 요한 사도는 일찍이 하늘에 나타난 두 가지 큰 표적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해산의 진통을 하는 여자와 그 여자가 낳은 남자아이를 멸하려는 큰 붉은 용에 대한 것이었다(12:1 이하). 이제 크고 놀라운 표적, 즉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담은 일곱 천사가 부은 일곱 금 대접의 심판으로 묘사된 하늘에 있는 또 다른 표적을 전해 준다.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진 후에 나타난 세 번째 마지막 화와 극에 달한 사건들(11:14 이하)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이며, 이것은 날들의 끝에 심판과 구원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라고 표현한 것이다. “재앙”이란 말의 ‘플레게’는 ‘플랏소’(때리다, 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강타, 재난, 상처’라는 뜻이다. 금이나 철을 가공하기 위해 때려서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듯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상태로 만들어 낸다는 의미이다. “일곱”이란 말을 붙여 심판과 구원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내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고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언약이 완성된다. “마치리로다”라는 말의 헬라어 ‘텔레오’는 ‘완성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0-14)

 

그 완성된 모습을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2절)라고 말씀한다. 요한 사도는 승리의 노래를 보여주기 위해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일곱 천사에 대한 기록을 잠시 미룬다. “유리 바다”란 ‘휘알리노스’는 문자적으로 ‘투명한 바다’라는 말이다. 4:6에서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7)라고 하였다. 에스겔 1:22에서 하늘 성전을 묘사하면서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라고 하여 하늘 성전을 궁창 위의 바다로 지칭하였다. 솔로몬 성전에서 놋으로 만든 물두멍을 바다라고 하여 제사장의 정결과 거룩을 유지하는 도구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하늘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왕상 7:23, 대하 4:2). 이런 점에서 궁창 위의 물을 본문에서 “유리 바다”로 말씀한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 받았을 때 뒤에는 애굽의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인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후 애굽 군사들을 수장시키셨다. 이 광경을 보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였다(출 15장). 이 사건을 배경으로 오늘 본문을 말씀한 것이다. 아니 유리 바닷가에 선 것을 출애굽 사건에서 홍해를 건넌 것으로 미리 보여주셨다.

그런데 2절 상반절에서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섞인 바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유리 바다”란 불과 물이 함께 있다는 뜻이다. 불은 심판을 의미하고, 물이 죽음을 말한다면 유리 바닷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죽음과 심판을 건너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바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다. 짐승의 표, 육백육십육에서 벗어나 이긴 것은 자기 힘과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 은혜가 입혀진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교회요 성도이다(고전 10:1-2, 롬 6:3-4).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열 번째 재앙에서 드러난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다.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건짐 받을 수 있었고 또한 홍해에서 육신이라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유리 바다 가에 서서”라는 말의 ‘히스테미’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똑바로 세워진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히스테미’에서 온 말이 ‘십자가, 언약의 기둥’이라는 ‘스타우로스’이다. 결국 이긴 자들이 “거문고”(하프, 수금)를 가지고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3절a)라고 말씀한다. 5:9-10의 “어린 양 앞에서 성도들의 기도인 새 노래”, 14:1-5의 “시온산에서 십사만 사천의 새 노래”와 같은 것으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이다. “모세의 노래”는 홍해를 건넌 후 출애굽기 15장의 노래도 있지만 신명기 32-33장에 길게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노래”란 애굽에서 구출되고 홍해를 건너서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노래하였다. 그 “모세의 노래”가 “어린 양의 노래”이다. 다시 말해서 신명기 32:44에서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라고 하여 모세 때에 애굽을 심판하고 구원을 이루신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호세아’(여호수아)와 함께 함으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실 것임을 미리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의 노래”는 “어린 양의 노래”로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먼 미래에 우리가 이렇게 노래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요 성도는 지금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입어 어린 양의 노래를 날마다 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러기에 유리 바닷가에서 서서 어린 양의 노래를 한다는 것은 어린 양과 하나 되는 은혜 속에서 늘 있는 것이다.

그 노래의 내용은 3절 하반절과 4절에서 이렇게 밝혀 준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3b-4절).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1-13, 17)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3-4, 9)

 

모세의 노래에서 밝혀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셨는데 현실적으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처소, 성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라고 하였다.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표현한 것은 야곱과 같은 이스라엘의 죄성을 하나님께서 안고 이루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언약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성취하셨다. 오늘 본문은 이 언약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서와 시편에도 이렇게 말씀한다.

 

이방 사람들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하지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들의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음이니이다(렘 10:7)

 

9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10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시 86:9-10)

 

여기서 “이방 사람들의 왕이시여”라는 표현은 “만국의 왕이시여”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주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셨다. 따라서 “전능하신 이”시며 “만국의 왕”께 “하시는 일이 크로 놀라우시도다”,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하며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라고 노래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십자가만 “주의 의로우신 일”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 선언하였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2-4)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란 이러한 하늘의 모습을 이 땅에 보여주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교회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짐승의, 짐승에 의한, 짐승을 위한 교회이다. 우리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로서 “어린 양의 노래”를 하고 있는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오직 하나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 “주의 의로우신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어진 은혜 안에 있기 때문이다(202311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58.1501-04 주의 의로우신 일(202311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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