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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_요한복음 21:15-18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불편한 진리 2023. 5. 15. 09:47

https://youtu.be/yeJ9uOJTDEs

 

 

주제 특별 강론

요한복음 21:15-18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

 

예수님은 부활 후에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고 말씀하셨고(마 26:32)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셨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헬라어 성경을 보면 두 번은 ‘아가파오’(아가페), 세 번째는 ‘필레오’(필리아)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필리아)로 답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필레오’(필리아)는 친구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우정으로 정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지 못하는 차원 낮은 사랑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물었으나 베드로는 친구를 사랑하는 정도로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말 그런 의미인가?

사실 헬라어로 사랑을 표현하는 말은 이 외에도 ‘에로스, 스토르게, 플라토닉’ 등의 단어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아가페’는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 ‘필리아’는 친구의 사랑, ‘에로스’는 이성 간의 사랑, ‘스토르게’는 가족 간의 사랑, ‘플라토닉’은 정신적인 사랑으로 구분한다. 심지어 ‘아가페’를 최고의 사랑이라고 하면서 기독교가 만든 단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헬라적 사고에서는 사랑을 아주 신비로운 것으로 이해하였기에 다양한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성경에서 ‘아가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찾아보아야 하는데 번역본은 ‘70인역’(LXX ; Septuagint, 헬라어에 정통한 유대인 율법 학자를 열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차출한 72명이 알렉산드리아에서 BC 3세기 중엽부터 BC 2세기 말엽까지 약 100년간 번역한 것이다)이다. 구약을 유대인들이 직접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기에 신약의 헬라어 단어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13:15에서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사랑하여 강간하는 사건을 설명하는데 동사 ‘아가파오’(히, ‘아헤브’)와 명사 ‘아가페’(히, ‘아하바’)가 사용되었다. 또한 사사기 16:4에서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히, ‘아헤브’)한 것에 대해서도 ‘아가페’를 쓰고 있다. 역대하 11:21에는 문란한 사랑(히, ‘아헤브)으로, 전도서 5:10에는 물질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랑(히, ‘아헤브’)으로, 전도서 9:6에서는 영원하지 않고 끝나는 사랑(히, ‘아하바’)으로 ‘아가페’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도 보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아가파오)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요 3:35)에서는 ‘아가파오’를 사용하고 있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필레오)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 5:20)라고 ‘필레오’를 쓰고 있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필레오)”(요 16:27),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필레오)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무릇 내(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하는(필레오)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계 3:19)라는 말씀에서 다 ‘필레오’로 표현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가페’라는 단어로 한정하여 사용하지 않고 ‘필리아’와 교차하여 사용하였다.

중요한 것은 헬라어 ‘아가페’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거룩한 사랑, 무조건적 사랑, 고귀한 사랑이 되든지 아니면 인간적인 사랑, 탐욕적이며 추잡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즉 문맥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아가페’라는 헬라어 단어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가두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의 말처럼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하신 말씀을 헬라어로 기록하였다면 다양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6,17절)라고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신 것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에 대하여 제자들을 대표하는 물음이다. 그래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라고 물으셨는데 그 이유는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막 14:29)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표현 헬라어 ‘후토스’는 중성이다. 즉 ‘이것들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를 비롯한 재물, 이 땅의 모든 것을 사랑하느냐 하는 총체적인 차원에서의 물음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물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라고 말씀한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롬 1:28).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15-21)

 

여기서 “지키리라”(15절), “지키는”(21절)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보존하다, 마음에 품고 새기다’라는 뜻을 지닌 ‘테레오’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계명”을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이다. 어떤 계명인가? 헬라어 성경에는 “그 계명”(헬, ‘호 엔톨레’ : 그 명령, 그 말씀)이라고 분명히 명시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구약의 말씀을 지칭한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히, ‘아하브’)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하셨다. 마음에 새기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늘 말씀을 강론하고 손목과 미간에 표를 삼고 문에 기록하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손목이나 미간, 문에 기록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마음에 새기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하시며 “또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을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언약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셨었고(렘 31:31-34, 겔 36:26-28)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순종하심으로 성취하셨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이 마음을 품으라”라는 말의 ‘프로네오’는 ‘생각하다, 전념하다, 마음에 두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죽음으로 복종하신 십자가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 안에 새기신다는 뜻이다. 즉 우리 마음에 십자가(헬, ‘스타우로스’ : 언약의 기둥)를 세우셨다(헬, ‘히스테미’)는 의미이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함께 하는 거처, 곧 하나님의 집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 역시 베드로와 같이 나를 부인하지 못해 예수님을 부인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넘어진 자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삼아주신 은혜로 인하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5,16,17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더 잘 아신다. 십자가로 찾아오셨기에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갈 2:20).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계명을 지키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주어지는 처음 사랑이다(계 2:4).

정리하자면 예수님의 계명이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품도록 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 십자가라고 선언하였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5-10)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아니 믿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구원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씀한 이유는 우리의 본래 상태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표현이다. ‘원수, 대적자’라는 말 헬라어 ‘에크드로스’는 ‘미움, 증오’라는 뜻의 ‘에크도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만나면 죽일 정도로 증오하는 자가 ‘우리’요 ‘나’이기에 십자가는 내 죄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

 

(2023051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특강_요2115-18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202305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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