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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예수 그리스도-십일조, 폐지인가 완성인가?

불편한 진리 2022. 11. 7. 15:05

https://youtu.be/ji4jRL4Sj_I

 

 

 

십일조와 예수 그리스도

- 십일조, 폐지인가 완성인가? -

 

몇 년 전 모 대형교회에서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교회 정관을 수정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로 인하여 한국 교회에 쟁점화되는 듯 하였으나 실제는 교회 재정 충당에 가장 크게 점유하기에 서로 교리가 다른 교회, 교단이라 할지라도 십일조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이견 없이 당연한 헌금이며 성도의 의무로 굳어졌다.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에게 ‘십일조=돈(헌금)’이라는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 이제는 시간의 십일조도 드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는 교인들의 고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십일조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 십일조를 어디에 어떻게 내느냐 하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온전한 것인가? 1원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여야 하는가? 수익의 세전 십일조인가 세후 십일조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 꼭 내야 하는지 아니면 떠나온 시골 교회가 어려운데 거기에 보내면 안 되는지 하는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을 한다. 심지어 시골 교회 교인 중에서는 키우던 개를 팔았는데 개는 율법에 부정하다고 하였으니 개를 판 돈의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그 저변에는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율법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끝없이 규정해야 할 사안이 생긴다. 그러기에 우리는 율법의 근본적인 문제,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통해 나타내신 본질적인 뜻을 생각하지 않고 계명이나 규례로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계속 더 구체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인해 스스로 실족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민을 왜 하게 되었을까?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막무가내로 강조를 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십일조가 돈 문제로 인식되어 있고 그것이 곧 복을 받는다는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 물질의 복을 받고 하지 않으면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고민이 따라 올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서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성경 전체적인 면에서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십일조”라는 말에 대한 이해

 

십일조에 대한 오해는 “십일조”(十一條) )라고 번역된 우리 말 자체가 세금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더더욱 의무에 대한 생각을 크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십일조’란 히브리어로 ‘마아세르’라고 하는데 ‘십분의 일’, 또는 ‘열 곧 하나’, ‘열 번째 것의 하나’라는 뜻이다. ‘마’는 ‘그릇, 용기, 장소’를 나타내는 접두어이고 ‘아세르’는 ‘열’을 뜻하여 ‘열이라는 온전함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의미이다.

‘마아세르’를 번역한 헬라어는 ‘아포데카토오’는 ‘아포’(온전한)와 ‘데카테’(십, 열 번째)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이다. 마아세르나 아포데카토오나 단어 자체에서 열이나 열 번째의 의미가 성경에서는 완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완성된 혹은 온전한 열 번째 것이라는 말로 가장 좋은 것, 대표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 그것을 열 번째 것이라고 한다.

물론 언어 자체에 성경적 의미를 다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어 ‘마아세르’와 그 헬라어 번역어인 ‘아포데카토오’라는 말에서 보듯이 조세, 즉 세금의 성격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말로 십일조(十一條)라는 말로 번역되어 마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강제적인 의무가 된 십일조(什一租)라는 세금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우선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율법 이전의 십일조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17-20)

 

남쪽의 다섯 족속이 북쪽의 네 족속을 섬기다가 거부하자 전쟁이 벌어졌고 이에 소돔에 거하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까지 잡혀갔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318명의 가신을 데리고 동맹을 맺은 마므레와 함께 빼앗겼던 재물과 포로 된 자들과 조카 롯을 찾아온다. 전쟁을 수행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 앞에 살렘 왕 멜기세덱과 소돔 왕 베라가 등장한다. 멜기세덱에 대하여 살렘(예루살렘) 왕,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묘사되어 있다. 멜기세덱은 그의 신분-왕이요 제사장-에 걸맞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당신의 원수를 그대 손에 넘겨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쉬운성경 19-20절).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복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승리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음을 알려준다. 이것에 대해 아브람은 이번 전쟁이 하나님께서 친히 용사가 되셔서 치른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으로 여기고 그가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준다.

여기에 나타난 십일조는 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복 받은 자라는 사실에 근거하며, 전쟁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그리고 그 땅 족속으로부터의 위협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셔서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자신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표로써 드린 십일조였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안에서 복을 받았기에 그 복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행한 것이 십일조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일이 잘되면 바치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약의 복을 누리고 있기에 그것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드린 것이었다. 또한 그 후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모든 삶이 높은 분에게서 복을 받고 사는 것임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언약 안에 거하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야곱의 십일조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

 

속임수로 장자의 복을 가로챈 야곱이 부모를 등지고 자신의 죽이려는 형의 눈을 피해 도망하던 중 노숙을 할 때 혼자라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그대로 말씀하시며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 28:13-15). 야곱에게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있었다. 곧 야곱의 서원이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시기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야곱이 십일조를 하였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란에서 돌아오면서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언급하며 그 약속대로 시행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 32:9,12)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에 모든 기대를 걸고 그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앞으로 오실 언약의 실체이신 메시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야곱이 십일조를 하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하나님께서 책망하거나 그것을 문제 삼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심은 십일조를 야곱이 제대로 하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고 야곱은 그 언약의 말씀을 실행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수긍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다. 야곱은 하란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것이 얍복 나루터에서 걸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율법에서의 십일조

 

이제 율법 안에서 말씀하는 십일조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자. 아브라함이 하였던 것, 야곱이 서원한 이것이 나중에 율법 안에서 레위 지파가 십일조를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레위 지파가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신 14:22-25)

 

십일조를 누구와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는가? 바쳐진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였다. 이렇게 하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십일조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십일조의 출처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나왔다. 이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얻은 땅이다. 약속의 땅에서는 어린 양의 피가 근거가 되어 소산이 나왔다. 그러니 십일조의 소산은 어린 양의 희생에 의한 결실로 자기와 자기 권속들과 같이 먹고 즐겼다. 결국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지고 자신과 권속들과 같이 먹게 했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모세의 율법에서 다음과 같이 십일조를 규정한다.

 

① 첫 수확 이후에 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이었는데, 이 십일조는 가나안 땅의 원 소유주이신 하나님의 것이었고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 그들에게 지출되었다(레 27:30-32).

② 이 십일조에서 레위인들은 십분의 일을 제사장들에게 드렸다(민 18:26-28).

③ 백성들이 드린 두 번째 십분의 일은 성막에서 레위인과 자신들의 가족들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다(신 12:1-19).

④ 또 한 차례의 십일조는 매 3년마다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들을 위해 드렸던 것이 있다(신 14:28-29).

그런데 레위 지파는 땅이 없는 자이다.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가 땅이 없는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아브람이 십일조를 바친 원리와 같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한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멜기세덱과 레위 지파가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제사장이란 백성에게 죄 용서를 보여주는 중보의 역할을 한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에 중보자를 통하여 만난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희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산다는 고백이 십일조를 통하여 드러난다.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 7:4-10)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복을 받는데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릴 때 레위 지파도 아브람의 허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나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제사장의 희생으로 우리가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사장의 희생정신을 모르는 제물은 하나님이 거부하신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릴 때 단지 열 개 중의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난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출애굽 때 장자가 살아남은 것은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아남았기에 모든 처음 것(대표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장자 대신 레위를 선택하신 것이었다.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민 3:12-13)

레위 지파의 희생의 모습은 땅이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나머지 다른 모든 지파의 사람들은 레위 지파의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표현이 바로 십일조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레위 지파도 완전한 제사장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마치 멜기세덱이 나타나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즉 구약의 제사장은 레위라고 하는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는데 멜기세덱은 레위 족속, 즉 레위 혈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으로 등장한다.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한 인물(제사장적 왕)로서, 레위의 혈통이 아니라 유다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하였다. 더구나 예수님은 제사장직의 승계가 필요 없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시 110:4).

결국 십일조란 무엇이냐가 아니라 누구냐 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십일조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 속에 주신 것이었다. 대표되는 장자를 드리는 것과 같은 원리에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친히 제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십일조가 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열이 하나이며 하나가 열이다. 즉 열을 대표하는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이다. 아주 복잡한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는 십일조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우리가 구약의 제사를 생각하면 무조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하며 나아가느냐로 생각하는데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나타내시려고 하느냐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를 통해 누구를 보여주려고 하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 역시 인간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하실 것이라는 계시였다.

실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 독생자(하나이신 분)를 열(자기 백성들과 하나되는 완성)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십일조를 하셨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구속을 얻은 성도는 이미 십일조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로 신앙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는 자세가 아닌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드려진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롬 12:1).

복이 십일조를 하고 안 하고 하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14장에서 붙여주신 전쟁과 십일조와 멜기세덱이 모두가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의 관심은 십일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일조를 완성하신 분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로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롬 14:8).

 

말라기에서의 십일조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7-10)

 

이 본문을 가지고 소위 말하는 십분의 일에서 조금도 오차가 없는 것으로 온전한 십일조만을 강조한다면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십일조와 봉헌물’이다. 봉헌물은 제사 제물을 말한다(말 1:13, 2:13).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이 말씀으로 십일조를 강조한다면 십일조뿐만 아니라 제사 제물도 동일하게 강조를 해야 한다. 십일조는 드리는데 제사 제물(헌물)은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조건 십일조 자체만을 강조하다 보니 구약 시대도 신약 시대도 아닌 이런 이상한 시대에 사는 현상이 되었다.

문제는 십일조에 대한 기복적인 개념을 강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다는 데 있다. 복은 헌금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복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복이란 천국이고 영생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연합된 상태가 복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지금 백성들을 향하여 제사장에게 드려야 할 하나님의 십일조를 조금도 떼어먹지 말고 온전히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성경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하나님을 도둑질하겠느냐’라는 말이다. 여기서 “도둑질”이란 말의 히브어 ‘카바’는 ‘덮다, 속이다, 속여 빼앗다’라는 뜻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십일조와 헌물을 하는 그것이 도둑질이고 하나님을 속여 빼앗으려고 하는 행위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9절 말씀도 도둑질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따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도둑질하고 속여 빼앗아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을 통해 본래 누구의 땅에서 난 것으로 먹으며 또한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제도 속에서 결국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아야 했다. 애굽에서 자신들을 건져내신 것은 바로 죄악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 구원은 하나님 나라로서 상징되는 가나안 땅에서 제사를 통해 구원의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과거 애굽에 있었을 때를 늘 기억해야 했다. 그 의미는 과거를 돌아봄으로 과거에 매여 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늘 되새기고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실 메시아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그네, 고아, 과부와 같이 자기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었던 이스라엘을 건지신 분이 누구인지 알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언약의 취지이다. 이것은 원래 모세 언약이 추구한 것대로 고아와 과부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임을 항상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십일조란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일차적으로는 십일조를 드리는 네가 누구냐 하는 물음이었다. 즉 애굽에서 나그네와 같고 고아와 과부와 같이 전혀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게 된 너는 어떤 자가 되었느냐? 누구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구원에 의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된 자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의해 약속의 땅에 살 수 있게 된 것은 애굽을 치실 때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다는 것을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면서 늘 되새겨야 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희생 제사란 언약의 실체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누군가 하나님 편에서 보낸 자에 의해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제대로 잘 보여줄 때 동물을 잡아 제사하는 이 제사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 고수 의지는 십일조와 헌물을 강조하는 것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모든 것과 땅의 회복은 결국 언약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생 제사를 통해 언약의 진정한 희생자가 열이요 하나이신 분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스라엘이라면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복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지는 땅이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의한 땅으로 언약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줄 때 아름다운 땅이요 복된 땅이다. 그래서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2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오늘날에도 제사 제도가 존속하고 있는가? 결국 이스라엘이 성전과 제사 제도 속에서 제사장이 보여주고자 했던 율법 언약이 무엇이었는가? 거듭 강조하지만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었고 그 언약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십일조와 헌물 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십일조, 헌물, 땅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였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질책하는 말씀으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것이다. 아무리 바벨론 포로로 또다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상황으로까지 경험했다 할지라도 인간들은 성전의 본질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 제도 중의 하나인 온전한 십일조, 온전한 헌물을 드릴 수 없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라기 말씀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십일조를 드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진정한 복은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 복을 우리 인간은 결코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십일조로, 온전한 헌물로 이 땅에 오셨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구원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가 죄를 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지 헌금을 하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십일조가 무엇인가? 헌물이 무엇인가? 땅이 무엇인가로 물을 것이 아니라 누구인가로 물어야 한다. “십일조가 누구입니까? 봉헌물이 누구입니까? 땅이 누구입니까? 예!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일조를 어떻게 얼마만큼 해야 합니까?”라고 하는 물음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물며 “십일조를 반드시 본 교회에 내야 합니까? 혹은 시골 고향 교회에 보내도 됩니까?”라고 하는 물음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몇 푼의 헌금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몇 푼의 돈을 바쳐서 우리의 의무를 다했으니 복을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십일조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도둑질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온전한 십일조로 완성하셔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만드셨다. 주님의 피 값으로 우리 자신을 사셨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것 중의 십분의 일이 주님의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주님의 것이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내게 주어진 것 중에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13절). 1장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몰랐다. 말라기 선지자가 외치므로 비로소 그들의 죄악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자에게 임하는지가 구체적으로 공개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하는 종교 행위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행위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입을 막았으니 복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교회당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헛된 데로 돌리려고 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항상 확인해야 한다. 진정으로 예수 믿는 자는 헌금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세상의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시기 때문에 버리게 되어 있다.

요즘 교회의 전도지들을 유심히 보면 참신한 교회임을 표방하는 교회로 우리 교회는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둥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둥 등록하라고 붙잡고 성가시게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교회에 일차 방문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전도인가? 그것은 헌금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교인, 목회자의 권위주의에 신물을 느낀 교인, 등록하라고 성가시게 하지 않는 교회를 찾는 떠돌이 교인들의 입맛을 맞추려는 감언이설에 불과하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일조를 하고 안 하는 것을 전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말씀대로 전하는 교회, 교회를 전하는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이다.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드러내는 교회여야 한다.

 

신약에서의 십일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드리는 십일조 품목 중에 왜 하필 박하와 운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예로 들고 있을까? 구약에서는 토지 소산의 십일조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들고 있는데 이 품목에는 박하와 운향, 회향과 근채 같은 것들은 들어 있지 않다. 특히 향신료로 쓰이는 운향은 자생식물에 속하는 것으로 십일조 대상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논란이 많았던 식물이다. 그 품목들은 사실 드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그것조차 십일조를 드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십일조에 집착하고 있는 외식에 대해 비판하신 것이지 십일조를 권장하신 말씀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말씀은 “율법의 더 중한 바”라는 말씀인데 헬라어로 ‘바뤼스’인데 ‘무거운’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무겁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한다(마 23:4). 즉 십일조로 인하여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상태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 정의, 그 긍휼, 그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다음 말씀에서 문장의 시제이다. 과거완료형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둘 다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십일조를 행한다고 했었다면 의와 긍휼과 믿음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말씀하는 구절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외식된 모습을 폭로하시고 구약에서 의, 긍휼, 믿음, 사랑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함께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이것이 구원, 영생, 십일조의 완성이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만 온전한 십일조이시며 그 온전한 십일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그 언약의 말씀으로 살아난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한 십일조가 되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내고 있는 십일조이다(2022110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특강_십일조와 예수 그리스도_십일조 폐지인가 완성인가(2022110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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