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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23
요한계시록 6:5-6
셋째 인
성경의 중심은 ‘나’가 아니다. 흔히들 성경은 나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언약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그 언약이 지향하는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이 나의 이야기라고 할 때 나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나의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로 생각한다. 원수, 악은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믿는다. 그러다보니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 환난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억울하게 여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수없이 말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니까 금방 돌아서서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따진다. 사실은 은혜가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에 의한 믿음이란 돈과 관계된 것이 아니며,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천국에 들어가는 도구도 아니다. 믿음이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이다. 믿음의 주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버려진다고 해도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 되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신다.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5절). 셋째 생물에 의해 “오라!”라는 선언이 있자 “검은 말”이 등장하고 그 탄 자의 손에는 “저울”이 있다고 하였다. 검은색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애 4:8)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계 6:12)
이렇게 볼 때 검은 말은 기근으로 말미암은 고통과 슬픔에 처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그런데 검은 말을 탄 자가 손에 저울을 듣고 있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전쟁에 사용되는 말이 등장한다는 것은 싸움이 예상되는데 저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저울은 6절에서 표현하였듯이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를 측량하기 위한 것인데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펴보자.
23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4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5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 26 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레 26:23-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에 순종하면 복을 주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 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져 마음에 새겨진 것을 의미하고 불순종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말씀을 대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주가 임한다고 해서 특별히 무엇인가를 안 되게 만드신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 아래 내버려 두신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저주 아래 심판의 모습을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주니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상태라고 말씀한다.
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17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 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겔 4:16-17)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의 상황을 말씀하시면서 걱정과 염려 가운데서 떡을 달아 먹고 물을 되어 먹는 그런 상태가 될 것을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390일 동안 모로 누워 하루에 음식물은 20 세겔씩, 물은 1/6 힌씩 마셔야 했다. 요한 사도가 본 것은 바로 이러한 구약적 배경을 담고 있다. 이러한 구약의 말씀을 전제로 이해한다면 음식을 저울에 달아 먹어야 할 만큼 기근으로 곤궁한 상태에 두시는 심판을 말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순간 요한 사도는 네 생물 사이로 나는 음성을 듣는다.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6절).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마 20:1-2)라고 한 것을 보면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그렇다면 하루 노동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이 밀 한 되가 아니면 그것보다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 보리 석 되라는 것이다.
“되”라는 것은 우리 성경으로 번역할 때 쓰인 용량이다. 헬라어로 ‘코이닉스’인데 약 1.08ℓ이다. “밀 한 되”는 당시 장정 노동자가 하루 먹는 양을 말한다. 하루 품삯을 가지고 밀을 사면 혼자 하루 먹을 수 있는 양이 되지만 좀 더 저렴한 보리를 사면 세 되나 되니까 한 사람이 3일을 먹든지 식구 세 사람이 하루 먹을 양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의 상태를 양식이 없는 기근으로 인한 고통의 심각함을 표현한 말씀이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가 이렇게 선포하였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그렇다면 셋째 인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그다음에 보면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이스라엘 땅에 생산되는 3대 작물은 곡식(밀)과 감람유와 포도주이다. 곡식은 귀한데 감람유와 포도주는 풍성하다는 뜻이다. 저울을 손에 든 검은 말을 탄 자가 밀과 보리는 타격을 입혔으나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신 7:12-13)
구약에서 포도주와 기름은 모든 것이 풍족할 때 누리는 물품으로 언급된다(참고 신 11:14, 28:51). 역대상 32:27-28에서도 히스기야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위한 창고를 지었다고 표현하여서 부와 영광을 누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포도주와 기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풍부함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기름과 포도주는 제사용이기도 하다. 기름은 소제에 필요한 것이고 포도주는 전제에 필요하다.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분의 이 에바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로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쓸 것이며(레 23:13)
양식이 없는 기근의 상태에서도 감람유와 포도주가 있으니 제사 행위는 계속된다. 이것이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이다. 말씀이 없어 기갈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허락하시니 풍족함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말씀 없는 제사에 마음껏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참된 양식이 없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제사는 그저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곡식을 해치는 것이나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지 않은 상태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드러난 한 면모이다. 말씀의 본질은 놓치고 참된 양식이 없는 상태에서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종교성 그것이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는 심판에서 회복될 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호 2:21-22)
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1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욜 2:18-19)
여기 셋째 인을 여는 것도 “해치지 말라”라는 선언이 주어짐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에 일어나는 일들임을 나타낸다. 단순히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고 어려움이 있는 고통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양식이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지 못하게 하시니 인간들의 죄성에 의해 율법적으로 행하는 종교적 행위들을 그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먼 미래의 것으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종말로 드러나고 있다. 복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배와 찬양, 기도, 헌금, 선교 등 종교적 행위는 여전히 성행한다. 성경 말씀을 나를 위한 이야기로 알기 때문이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5-28)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은혜는 나의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의한 화목제물에 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 믿음 안에서만 생명이다. 이 종말의 때에 성경을 왜곡되어 자의적으로 풍성한 해석들을 내어놓는 교회들이 많지만 참된 양식으로써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건물 교회들 중심으로 형식적인 예배, 기도, 찬양, 헌금, 선교, 봉사 등만 무성하다. 밀 한 되, 보리 석 되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참된 양식이 되어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인 교회요 성도이다(202302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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