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

25. 요한계시록 6:9-11 다섯째 인

불편한 진리 2023. 2. 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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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25

요한계시록 6:9-11

다섯째 인

 

오늘날 교회들은 제자훈련하고 성경 공부하여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친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9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섯째 인을 떼심으로 요한 사도가 본 것은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부르짖는 모습이다. “영혼”이라고 표현된 말은 헬라어 ‘프쉬케’인데 ‘목숨, 생명’이라는 뜻인데 한마디로 ‘지상의 목숨’이다. 이 말씀은 구약에서 제사 제도를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다.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레 4:7)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생명”을 70인역에서 ‘프쉬케’라고 번역하였다. 희생 제물의 피는 뿌리기도 하지만 제단 밑에 쏟아부었음을 보여주고, 그 피가 육체의 목숨을 대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피는 오실 메시아의 죽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육을 당한 그 죽음에 함께 한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여기 “제단”이란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하늘나라에 실제로 제사하는 제단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자들의 죽음이 누구를 근거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의 죽음을 제사 용어로 표현하였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이 말씀은 단순히 바울 사도와 같은 자들이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특별한 죽음을 한 순교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에서 칼을 가진 자에 의해 무참하게 살육당한 모든 성도를 의미한다. 지상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땅에 뿌려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그 희생이 하늘 제단에 드려진 것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니까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증거’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거란, 자기 믿음의 증거로 구원의 확신이 있다든지 방언을 한다든지 혹은 그 외 다른 무슨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들이 많다. 또는 죽을 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입었다든지 아니면 기도로 말미암는 기적의 체험을 증거로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증거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말씀의 증거라면 예수님의 이적을 보거나 경험하였다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이적을 베푸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그때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6-27)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경험한 표적 자체는 썩는 양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이적은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표적이었다. 표적이란 이정표요 화살표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 증거는 오직 십자가뿐이다. 그것 외에 다른 말씀 다른 증거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1:2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하였고, 1:9에서도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하였다. 급기야 20:4에서는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가 있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결코 환영을 받는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살육을 당하고 목 베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 교체되어 한몸된 모든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12:17에 이렇게 말씀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 12:17)

 

그러므로 성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책임을 지고 선두에서 총대를 멘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의 현실이다. 십자가는 가상현실이 아니다. 상상이나 지식으로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사도와 함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된 자(1:9)이기에 성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고난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요한 사도가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된 자로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면 이 요한계시록을 읽는 그 말씀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우리는 요한과 같은 환난과 나라와 참음이라는 밧모 섬에 함께 있는 것이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 제단 아래에서 외치는 것이 무엇인가?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10절). “대주재”란 헬라어로 ‘데스포테스’라는 말인데 ‘소유자, 주인’이라는 뜻이다(딤후 2:21). 한마디로 만물의 주권자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사용한다(벧후 2:1, 유 1:4). “거룩하고 참되신”이란 표현은 자기 마음대로 횡포나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라 구별되신 분으로 진리로 행하신다는 뜻이다. 거룩하고 참되신 주인이시기에 거룩하지 못한 것, 비진리에 대해 심판하심으로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렇게 전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심판의 대상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하늘에 거하는 자들’(12:12, 13:6)과는 대조된 표현으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로 멸망 받을 짐승들, 곧 땅적 존재를 가리킨다(13:8, 17:8). 결국 본문에서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달라고 하는 제단 아래에서 호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로 십자가의 원수를 보복해 달라는 신원이다. 이는 곧 구약의 말씀 성취 차원이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 4:1-2)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는 성도들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답변은 어떤 시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11절). 우리 성경에 “흰 두루마기”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스톨레’는 ‘길게 늘어진 흰옷’이라는 뜻이다. 이는 1:13에서 등잔대 가운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과 의를 입은 상태, 곧 구원의 은혜가 주어진 것을 나타낸다(3:4-5). 흔히 한국 교회에서 말하듯이 큰 상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길게 늘어진 흰옷’이 전부이다. 그것도 나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의 보상이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라고 하였는데 이 땅에서 먼저 죽임을 당한 성도들은 잠시 쉼을 얻는다. 그 이유는 동일하게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이 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경에 “그 수가 차기까지”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성경에 “수”라는 말은 없다. 이 말씀은 산술적인 숫자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 ‘플레로도신’(원형, ‘플레로오’)이란 동사는 수동태로 ‘채워지다, 완성되다’라는 뜻이다. 어떤 일정한 수를 채운다는 의미보다 완성하신다는 표현이다. 즉 죽음을 당하여 완성되기까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 왕국은 우리가 전도해서 사람을 불러 모은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판하시고 완성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죽임당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통해 심판하시는가?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부르짖게 하여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고 복수하는 형식으로 일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다윗의 부르짖음이 있다.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3-4)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서 그 사랑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다. 다윗은 이러한 부르짖음을 통해 세상의 실체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그 원수를 심판하실 분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어 나타나기를 언약 안에서 예언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이 심판받아 멸망 당할 그 근거를 언약 안에서 십자가로 확인시켜주시는 것이다. 결국 성도가 죽임당하는 것을 통해 세상은 죄악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기에 그 죄악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은혜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10:16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다는 것은 거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거기서 죽으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다섯째 인을 열어서 본 이 땅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이 다섯째 인의 개봉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매일매일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참여된 자가 성도요 교회이다(202302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25.0609-11 다섯째 인(202302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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