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론 21
요한계시록 6:1-2
첫째 인
요한계시록에서 역사의 주인은 어린 양이라고 말씀한다. 유다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이신 분을 어린 양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인 승리가 십자가 죽음에 근거해 있음을 나타낸다. 왕권의 다스림은 어린 양의 흔적을 가지고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보좌에서 취한 책의 인을 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하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것은 누구도 자기 힘으로 생명을 누리게 되었노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오직 어린 양으로 보좌에 앉으신 그분께만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요 하나님 왕국이다.
4장에서 요한 사도는 열린 문을 통해 “이리로 올라오라!”라는 음성을 좇아 보게 된 것은 하늘의 보좌였다. 보좌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5장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취하시는 어린 양을 본다. 그 순간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기도와 새 노래가 터져 나온다. 하늘의 천사들뿐만 아니라 하늘 위와 땅 위와 땅 아래, 바다 위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께 영광과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찬송이 돌려진다. 4장이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의한 찬양이라면 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능히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을 떼시는 내용이 전개된다.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1절). 4-5장에서 보좌에 영광과 찬양이 돌려지는 하늘 장면에서 6장은 지상에 어떻게 심판이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의 전환이 있다.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내가 보매”라고 표현하여 분명하게 본 것을 증언한다.
인이 떼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난다. 요한계시록 강론을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계시록을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곱 인을 떼시는 것은 시간의 순서나 여러 종류의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첫째 인에 포함된 나머지 인을 떼서 하나하나 펼쳐서 보여주신 것이다. 인을 하나씩 떼어감으로 더 세밀하게 세상의 실체와 하늘의 뜻을 보여주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당시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와 싸우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 ‘오라!’라는 소리로 외치면 사자들이 풀려 나와 공격하는 정황을 반영하여 묘사된 단어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막이 시작될 때 그것을 알리는 선언이 “오라!”라는 표현이다. 이 명령에 따라 세상의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은 세상이 주관적으로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지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2절). 어린 양 예수께서 첫째 인을 떼셨을 때 흰말이 등장하는데 “흰 말”이고 그 말에 탄 자는 “면류관”을 받았고 “활”을 가졌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 사이에는 많은 이견이 있다. 흰 말을 탄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적 그리스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양쪽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따라서 어느 쪽의 해석을 취하든 구원과 상관이 없다. 다만 심판 아래 놓인 세상의 실체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방인들과 같이 왕을 요구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왕이 될 자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신 17:16)라고 하셨다. 즉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위해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것은 곧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실 말이 중요하다기보다 말을 탄 자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에서 “흰 말”을 타고 있다고 하였는데 흰색은 하늘의 의와 정결을 상징한다. 영광중에 계신 그리스도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1:14)라고 하였다. 새 이름이 기록된 돌이 “흰 돌”(2:17)이라고 하였다. 성도에게 “흰 두루마기”가 주어지고(6:11), “희고 깨끗한 세마포”(19;14)를 입었다고 말씀한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보면 흰 말을 탄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외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나 성도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또한 그가 “활”을 가졌다고 말씀하였는데 시편 45:3-5에 보면 “3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4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5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라는 말씀에서 활로 원수의 염통을 뚫는 왕은 분명 메시아 예언이다. 그러기에 말씀에 근거하여 이런 왕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 메시아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해서 메시아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런 점에서 심판 가운데 흰 말을 탄 자와 19장에서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된다.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1-16)
흰 말을 타고 있다는 것은 같지만 6장의 본문은 분명히 19장의 말씀과 대조된다. 19장에서 흰 말을 타신 분은 요한계시록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첫 번째 인을 뗀 심판 속에 등장하는 흰 말을 탄 자는 심판을 위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면류관을 받고”라는 표현은 ‘디도미’(‘주다, 하사하다, 넘겨주다’)인데 4절의 두 번째 인에서 붉은 말에 탄 자가 “허락을 받아”라고 할 때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허락을 넘겨받아 실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흰 말, 활, 면류관”은 하나님의 심판을 드러내도록 허락된 것들이다.
그래서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라고 말씀하였는데 이 말씀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이기면서 나갔고 또 이기기 위하여 나갔다’라는 말이다. 즉 계속 이기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한 번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 것이다. 그래서 3:21에서 “내가 이기(겼)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5:5에서도 “유대 지파의 사자가 이기었으니”라고 하였다. 또한 요한복음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완료형으로 선언하셨다.
인간의 시각에서는 골고다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을 모독하던 한 반란자가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아 처참하게 죽어간 것으로, 로마에 저항하는 반역자로 낙인찍혀 로마 군병에게 죽임을 당한 메시아 사역의 처절한 실패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언약 안에 죽음을 넣어서 이제까지 보여주신 모든 말씀의 온전한 성취로 단번에 이루신 영원한 승리이다. 그 승리의 효과는 죽음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 안에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했다.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다(갈 2:20). 내가 이겨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하심으로 승리자가 된 것이다. 이것을 은혜라고 한다. 이 은혜는 한 번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계속적인 은혜 아래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것 안에서 승리를 누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사탄은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넘겨준 것이기에 원하는 자에게 십자가 없는 영광을 준다고 내세운다.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 4:5-8)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는 그것이 바로 하늘의 상황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자신이 직접 이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세상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교인들은 온갖 종교 생활을 통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 스스로의 승리에 기쁨과 만족감을 취하려고 한다. 결국 교회에 나오고 예수를 찾는 것도 이런 자기 승리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기도는 세상에서 상대방을 날마다 누르고 내가 이기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내 아이만큼은 대학에 넣어 주는 승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만은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게 해 주는 하나님을 믿는다. 내가 벌인 사업만큼은 망하지 않게 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욕심에 끌려 세상에서 이긴 자로 살고 싶어 하는 종교 생활일 뿐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교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자식으로 경쟁하고 집으로 경쟁하고 돈으로 경쟁하고 외모로 경쟁하고 학벌로 이긴 척하면서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스스로 흰 말을 탄 자로 이기고 또 이기려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것이 안 되면 그렇게 영웅같이 흰 말 탄 자를 따르고 싶어 한다. 그렇게라도 세상을 이기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첫째 인을 통해 드러난 세상의 실체이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죄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철저히 폭로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오직 하늘의 의가 생명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오직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여 승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 자체가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202301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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