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론 20
요한계시록 5:8-14
성도의 기도와 새 노래
열왕기하에 보면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왕하 20:1-2)라고 하였다. 그리고 6절에서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우리는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쉽게 우리에게 적용하여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을 향하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히스기야의 기도로 단순히 15년을 더 살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간에 므낫세를 허락하심으로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따라 일하신다는 것을 기도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사람들은 그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인간은 끝없이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고 그것이 하나님께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본문에 기도와 새 노래가 나오는데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하는 기도와 노래를 말씀한 것일까?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8절)라고 말씀한다. 모든 피조물과 성도들이 어린 양께 엎드린 장면이다. 왜냐하면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책을 취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의미이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의 상징인 네 생물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의 상징인 이십사 장로들이 거문고(하프)와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한 사도는 이 향이 성도들의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막(성전)의 성소에서 조각목에 금으로 입힌 분향단에서 향이 피어올랐고, 이것은 “여호와 앞에 영원한 향”이 되었다(출 30:1-8). 이를 통해 제사하는 것이나 하나님 백성들의 기도가 분향하는 것으로 상징화되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누가복음 1:10에서도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라고 말씀한 것을 볼 때 제사장에 의해 분향하고 향이 피워지는 그 시간은 백성들의 기도 시간이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기도를 이렇게 말씀한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3-25)
이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기도하였기에 출애굽이 하나님의 응답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기도가 구원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기도를 듣지 않는 분이시다. 아니 죄인들이 드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일절 받지 않으신다. 잠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8-29)
죄인의 입에서는 악을 쏟아 내는 것밖에 없고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이 땅에 의인이 있는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인은 누구인가? 이 땅은 의를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외부에서 의가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의를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언약을 하셨다. 그 언약이 구약 시대에 성막(성전)이라는 것으로 보여주셨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 제사에 참여되고 향이 피워지는 것을 따라 기도가 행하여진다는 점을 통해 오직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받으시고 희생 제사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도를 받으신다는 것은 성전의 실체가 되는 인물이 오시면 죄인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점에서 성전으로 아니 성전보다 더 크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마 12:6).
그러므로 출애굽 때도 이스라엘이 기도하였기에 그 응답으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도라는 형식을 통해 언약의 실체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여기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신 분이 어린 양이라고 나타낸 것이다.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능히 그 책을 취하시고 인을 개봉하실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고 그 모든 뜻이 드러났다. 그러기에 하늘의 이십사 장로들은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그분이 책의 말씀대로 시행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을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9-10절)라고 말씀한다.
“새 노래”라고 하니까 쉽게 찬양이라고 생각하고 앞에서 장로들이 드린 기도와 구분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결코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늘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드린 기도가 바로 새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 “새 노래”라고 표현하나? 한 마디로 기존에 이 땅의 노래가 있기에 이 땅의 노래와는 대조되는 것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노래이기에 “새 노래”라고 말씀한다.
출애굽기 15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찬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기에 나온 찬양이었다. 그런데 13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라고 하였는데 현실적으로 그 거룩한 처소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다. 그러나 17절에서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라고 노래함으로 단순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성전, 성소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소로 삼으신 것을 뜻하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라는 의미이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언약을 성취하신 어린 양 그분만이 책을 취하여 여실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늘의 찬양, 즉 새 노래가 어린 양께만 돌려진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11절)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하나님의 처소,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의미이다. 구원의 능력은 우리의 예배, 기도, 헌금, 찬양, 전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피에 있다.
성경은 가사가 은혜롭게 잘 만들어진 찬송을 음정과 박자를 잘 맞추어서 부르는 것을 새 노래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 이 땅의 노래에 불과하다. 유행가를 부르지 않고 찬송가를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새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르는 노래만 새 노래이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분께만 드려지는 영광과 존귀와 감사가 새 노래이다. 이것을 가지고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통치한다, 다스린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스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이루어졌다고 베드로 사도는 선언하였다. 여기서 “선포”란 헬라어로 ‘엑상겔로’인데 ‘발표하다, 축하하다, 선전하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왕 노릇한다는 것은 세상에 진리를 발표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선포하는 것이 왕 노릇 곧 다스림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골 1:13). 왕국의 왕이 선포하는 것은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다든지 또 동의를 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왕 노릇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된 우리는 이 땅에 복음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선포하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믿어달라고 구걸하거나 설득해서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묵시 속의 왕이 이 땅에 왕 노릇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왕으로서 선포하는 것이다. 왕으로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선포하면 그 말씀에 의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너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허락되지 않은 “그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자들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12절에서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였고, 13절에서도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말씀한다. 하늘의 새 노래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어린 양께만 드리는 노래이다. 이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기도이고 새 노래이다.
어린 양은 나약하고 비참한 상태로 너무나 초라하고 연약하고 서글픈 모습이기에 세상은 흠모하거나 따를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없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 짓밟힐 수밖에 없고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하고 거부하는 모습이다. 강해지기를 소원하고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린 양이란 결코 환영받는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이 어린 양이 책을 취하셨고 그분만이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인을 떼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인생이란 어린 양과 같이 세상에 의해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성도의 기도들이고 새 노래이며 또한 왕 노릇이다(202301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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