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32. 요한복음 11:38-44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_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불편한 진리 2022. 11. 30. 19:13

https://youtu.be/qcxmE9yaJyk

 

 

 

예수님의 이적 32 _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요한복음 11:38-44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본문을 38-44절만 보았는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은 아주 길게 11:1-44까지 기록되었고 이 표적을 계기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논의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본문에서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1-2절)라고 하였는데 실제 사건은 12장에서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12:1-3)라고 한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먼저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앞에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7개의 표적을 소개하고 그 표적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오해가 있었고 그에 따른 말씀을 전하시는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보여주심으로 유대인들의 결정적인 오해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공회에서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그래서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절)라고 언급한다. 즉 이 표적이 예수님을 죽이는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5-6절). 10:40에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1:28에 보면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라고 밝힌다(오늘날 이 베다니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성경은 언제나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요단 동편 베다니에서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로 오셨다는 뜻이다.

18절에 보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라고 하였다. 헬라어 표현으로는 ‘스타디온 데카펜테’라는 말인데 ‘15 스타디온’으로(1 스타디온이 192m로 본다면 192x15=2,880m) 3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이다. 요단 동편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직선 거리가 약 35Km정도 된다(구글지도에서 검색하면 오늘날 도로의 거리로 약 70Km가 된다). 요단 동편에서 배를 타고 건너서 예루살렘에 약 3Km정도 못 미쳐 베다니까지 간다고 하면 최소한 하룻길 이상은 족히 된다고 본다.

3절에 보면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나사로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소식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 이틀을 더 계셨다. 소식을 전하는 자가 간 하루와 예수님께서 하루 이상의 길을 가셨으니 나흘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17절)라고 하였고 39절에서도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라고 하였다.

이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죽으니까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니 의도적으로 죽기를 기다리신 정도가 아니라 죽어서 아예 죽어서 썩어질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유대인들의 장례는 죽은 당일에 바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벌써”라는 말 헬라어 ‘에데’는 ‘이제야말로, 마침내, 드디어’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이제야말로(드디어) 썩은 냄새가 난다. 나흘이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마 9:23-26/막 3:38-42/눅 8:49-56)을 살리신 것은 죽은 바로 그 시점이었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11-17)을 살리신 것은 죽은 장례 행렬이 나갈 때였다. 다시 말해서 죽은 날 살리셨다. 그래서 이 두 이적은 사람들에 의해 얼마든지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니라 잠시 기절하였던 상태에서 깨웠다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의해 다른 말이 나올 수 있는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완벽한 죽음이었고 그 죽음에서 살리신 것을 명백하게 나타내시는 것이 된다. 철저히 죽은 상태, 완전히 살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 살리신 것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 본문에서 단순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 “잠들었도다”라는 말은 깨어남을 전제한 성경적 표현이다(창 47:30, 단 12:2, 행 7:60, 고전 15:18, 살전 5:10). 그래서 “깨우러 가노라”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살리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2절)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라고 하셨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기를 원하셨다. 다시 말해서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살려주시는 분에 대한 관심이어야 한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일찍 오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21,32,37절). 인간의 한계는 죽음이고 죽음을 끝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젊은 사람 혹은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 참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 제대로 키워놓지 않으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에고 에이미’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구약에서 ‘나는 나다’라고 ‘존재하시는 여호와’로 나타내셨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죽은 자에게 부활을 주시는 분이다.’ 혹은 ‘예수님이 생명을 전달하시는 분이니까 믿어라! 그러면 믿는 자에게 부활, 생명을 주실 것이다’라는 그런 말씀이 결코 아니다.

부활을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본보기로 있었으니까 남은 것은 우리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에서나 혹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재생, 소생이 아니라고 해서 단순히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아직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 또는 생명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다.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생명이다.

우리 성경에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까 나를 믿어야 한다’라고 이해되도록 번역되었는데 직역을 하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여(혹은 내 안에서) 믿음을 받은 자는 죽음에서(혹은 죽음을 통하여)에서 산 자가 되고, 그리고 누구든지 그 산 자는 나를 통하여 믿음 안에서 영원한 죽음이 없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말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내가 믿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이요 생명이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4절)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한마디로 십자가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전히 드러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 십자가 사건을 앞당겨 보여주신 것이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이라는 뜻이다. 결국 완전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이고 그 부활이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부활이요 생명이 되었다. 그래서 40절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씀도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네가 믿으면”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믿음에 거하면’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 즉 십자가를 알고 십자가의 의미를 보게 되는 것은 믿음에 거하고 있을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만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죽음이 없는 생명의 세계를 이 땅에 가져오신 상태를 말씀한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절)라는 말씀에서 “풀어 놓아”의 헬라어 ‘뤼오’는 ‘해방하다, 석방하다’라는 뜻이고, “다니게”라는 말의 ‘휘파고’는 ‘떠나가다’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에 79회 나오는데 사람 앞에서 떠나간다는 의미(막 5:34, 요 18:8 등)로 또한 어떤 목적을 향해서 가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것(요 7:33, 16:5, 16:17 등)에 사용된 단어이다.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던 자가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함을 누리는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살아서 자유롭게 다니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가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믿음 안에 있게 되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부활이요 생명의 세계에 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부활절’을 기념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절기들이 마치 율법에서 정한 것처럼 1년에 한 번씩 고난주간과 연관하여 고난을 체험하기를 원하고 부활절을 지켜 나의 부활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부활을 사건으로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믿음으로 사는 것을 십자가로 확인하라는 것이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3-5)

 

“나사로”(1절)의 히브리어 표현이 ‘엘리에셀’(히, ‘엘리에제르’, 창 15:2, 출 18:4) 혹은 ‘엘르아살’(히, ‘엘아자르’, 출 6:23)인데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것으로 인간적으로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은 이 표현을 통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 즉 사망에서 생명을 주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에 기인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33절)라고 말씀한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0-12)

 

예수님은 중화요리집 같은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 혹은 생명을 배달하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지금 부활, 생명 안에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부활의 세계, 생명의 세계가 된 자가 성도이다(2022113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32.요1101-44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_죽은 나사로를 살리심(20220113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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