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34. 요한복음 21:1-14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_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심

불편한 진리 2022. 12. 18. 13:23

https://youtu.be/wzYbDudtbR4

 

 

 

예수님의 이적 34 _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심

 

요한복음 21:1-14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순종했기 때문에 놀라운 결과를 얻었으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늘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식의 해석들이 넘쳐나는 본문이다. 모 문구회사에서 펜에 153이라는 숫자를 넣어 성공을 하였다는 간증까지 돌면서 이 숫자에 대한 신비감은 더했고, 현재는 일오삼이라는 이름을 붙인 교회나 선교 단체, 기독교인들 기업체도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153이라는 숫자에 대해 교회 역사적으로도 많은 해석이 있었다. 갈릴리 바다의 물고기 종류가 153종류였기에 모든 물고기를 말씀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비롯하여 ‘게마트리아’(옛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수비학으로, 히브리 문자를 숫자로 치환하여 나타냄으로써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문장을 암호화하던 방법)를 활용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20:30-31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였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복음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타내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1절).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7-28 / 마 26:31-32)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여기서 “먼저~가리라”라는 말의 헬라어 ‘프로아고’는 ‘앞으로 인도하다, 앞서가다’라는 뜻이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먼저 도착해 계시겠다는 말이 아니라 거기서 너희들을 인도하고 이끄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마 4:18). 이는 이방 땅과 같은 갈릴리에 빛이 비추일 것을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하였다(마 4:12-16).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예언의 말씀과 한참 어긋나 있었다.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 7:41,52)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성전이 있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역사하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는 그곳, 이방 땅과 같은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 그들을 이끄시기 위하여 가신다. 그러기에 제자들 역시 처음 상태로 되돌려져야 한다. 단순히 되돌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실패하고 넘어진 곳에서 부르심이 있다. 잃어버린 상태에서 다시 찾아짐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자기 힘으로 따르고자 하는 인간 제자가 죽고 새로운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위함이다.

이전의 제자는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보여주시기 위해 선택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같은 제자였다면, 이제 예수님을 부인하고 넘어져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부름을 받아 성령으로 은혜를 입히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차원이다. 예수님은 일곱 제자에게 자신을 증거하시고(2절) 세 번째로(14절) 나타나셨다고 표현하여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말씀한다. 성경은 항상 ‘열두 제자 중의 하나’(마 26:14,47, 막 14:10,20,43, 눅 22:3,47, 요 6:71, 20:24)로 표현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돌로 하여 열두 제자, 곧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엡 2:20).

이제 예수님은 모든 상황을 예전의 상태로 세팅해 놓으시고 제자들을 만나신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4절)라고 말씀한다. 8절에 보면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라고 하였는데 ‘칸’으로 번역된 말은 ‘규빗’이라는 말이다. 한 규빗을 약 45cm로 본다면 약 90m 정도 되는 거리였으므로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새벽 시점이었기에 예수님인지 분명하게 알아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의 눈이 아직 열려 있지 않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암시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날이 새어갈 때”란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시각 즈음이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9절)라고 하였는데 “숯불”(헬, ‘안드라키아’)은 성경에 딱 두 번 나오는데 이 본문과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그 현장이다.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안드라키아)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7-18)

 

예수님은 닭이 곳곳에 우는 시각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그 디베랴 바닷가에서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을 올려놓고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계속 “시몬”이라고 부르시면서 세 번이나 같은 물음을 물으신다(요 21:15-17). 또한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10절) 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지금 생선을 먹기 위해 가져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생선과 떡은 이미 예수님께서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랐을 때 숯불에는 생선도 있고 떡도 있었다. 요한 사도는 장소를 1절에서 “디베랴 호수”라고 분명히 밝혔다. 거기서 떡을 예수님께서 준비하셨다는 것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을 제자들이 기억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라고 물으셨다. “얘들아”(헬, ‘파이디온’)라는 표현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즉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어린아이’로 보시고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에서 어린아이가 동원된 그 의미를 생각하도록 보여주고 계셨다. 또한 11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하였는데 “끌어 올리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헬퀴오’인데 6절에서 “들 수 없더라”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헬퀴오)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산 자가 된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갈릴리로 먼저 간다고((헬, ‘프로아고’) 하셨고 거기서 제자들을 이끌어(헬, ‘헬퀴오’) 부활을 증거할 자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참고 행 1:22). 그러므로 여기서 “백쉰세 마리”에 관심 가질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을 말씀에 근거하여 어떤 존재로 이끌고자 하는가를 나타내신 것이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마 13:47)

 

우리 성경에 “각종 물고기”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게노스’는 ‘자손, 종족, 혈족’이라는 말이다. 153에 대하여 히브리어 헬라어를 동원하여 게마트리아 방식으로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많은 물고기를 통해 많은 종족들 가운데서 불러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8-19)

 

“바다”란 하나님께서 창조 때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영역으로 나타내셨다. 그래서 성경 전체적으로 이방인의 영역으로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다.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겔 47:6-10)

 

이와 유사한 이적을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적이 있는데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4-6)

 

이적을 통해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한다. 비록 말씀에 의해 많은 물고기를 잡는 것으로 죄인을 부르셨으나 그것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물이 찢어지는 것으로 보여주셨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찾으셨을 때 이끄신 자기 백성들은 더 이상 그물이 찢어질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이 표적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다.

이런 점에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6절)라는 말씀은 단순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건지셔서 교회로 만드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물로 오른편에 잡은 많은 물고기와 같이 베드로를 대표한 제자들을 통해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는 일을 위해 제자들을 처음으로 되돌리시고 이끌어 인도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라는 물음은 예수님을 부인하여 철저히 실패한 자리를 거쳐 제자들을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되돌리신 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철저히 없음의 자리로 내려갔어야 했다. 그 없음의 자리, 그들이 처음 부르심을 받은 그 현장에서 예수님은 시작하신다. 이런 점에서 이 표적 역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신 것에 근거하여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우리가 힘으로 소유하고 더 가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없음의 상태, 죽음의 자리로 되돌리시는 것이다. 부활이라는 생명은 거기서 확인된다(2022121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34.요2101-14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_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심(202212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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