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41강 로마서 8:18-25 우리 몸의 속량

불편한 진리 2020. 7. 5. 22:44

로마서 마흔한 번째 강론

 

로마서 8:18-25

우리 몸의 속량

 

 

바울 사도는 7장에서 성도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로 말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8:1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육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존재로 정의하였다. 영에 속한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몸의 행위들을 죽이시는 그것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였다. 성경에서 아들로 표현된 것은 상속자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은 마귀가 제안한 것과 같은 십자가 없는 영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지신 십자가의 영광이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영광은 고난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고난 뒤에 영광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 그 자체가 영광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라고 하였다. 생각하건대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다. 헬라어로 로기조마이라는 말인데 간주하다’, ‘생각하다’, ‘신중히 생각하여 결론짓다’, ‘계산하다라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을 가지고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고난은 드러날 것과는 계산이 되지 않기에 바울은 신중히 생각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여기 나타날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칼륍토라는 단어인데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고 덮개로 덮혀져 있던 것이 공개된다는 의미이다. 즉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광은 이미 주어진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를 영광으로 보아야 하는가? 23절에 보면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라는 뜻이다. 즉 성령을 첫 열매로 소유한 자라면 하나님의 구속을 기다리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성령을 첫 열매라고 하는 이유는 구약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인데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23:19)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분의 이 에바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로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23:9-14)

 

 

여기서 우리는 약속의 땅에서 안식 후 첫 날 첫 곡식을 흔들되 번제, 소제, 전제를 아울러 함께 드리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의미는 유월절 어린 양의 완전한 희생 때문에 안식을 얻게 되었고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드리며 첫 곡식단을 증거물로 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첫 곡식단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곡식을 거두게 해 주실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안식을 예수님이 성취하셨고, 그 안식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성령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성령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은 자신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성령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살게 하시겠다는 보증이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13-14)

 

 

결국 우리를 구속으로 이끄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늘 탄식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몸의 속량을 기다리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께서 몸의 속량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속량(, 아폴뤼트로시스)이란 속전(몸값)을 받고 놓아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구속’, ‘해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속량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몸의 속량이라고 하였다.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까?

우리란 단순히 바울을 비롯한 이 서신을 받는 로마 교회 교인일 수 있지만 바울의 서신에는 언제나 지상에 있는 교인들을 교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로서 교회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이미 우리라고 표현하였었다(1:5).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란 이 서신을 읽는 라는 존재의 몸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의 우리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미 6장에서 이렇게 선언했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3-5)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 몸의 속량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의 속량을 의미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된 교회이다. 그래서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25)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말은 소망을 향해서’, ‘소망 안에서구원을 얻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의 몸으로 살고 있지만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주실 주님의 몸으로 이루실 것, 아니 묵시 속에서 이미 이루신 것을 역사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였다.

 

시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시간만 때우면 될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막연하게 먼 미래에 우리 손에 주어질 것이니까 안심하고 있자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이루신 것을 우리 안에 넣어놓고 시작하신다는 뜻이다. 아니 우리를 이미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던져놓고 시작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끝을 보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끝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끝을 보신다.

 

그러므로 고난은 성도의 성도됨과 구원의 합당함을 드러내며 세상이 심판받아야 마땅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것은 계속된다. 성도는 궁극적으로 주님이 다시 오셔서 주시는 영광을 지금 고난으로 앞당겨서 누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은 모두가 심판의 과정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발전과 개선, 개혁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평화로움을 꿈꾸는 것이야말로 환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체념하고 살아야 하는가? 염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을 비판하다가 죽어야 하는 것일까? 비관을 넘어 초월하고 초인처럼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나라로 옮겨진 것이라고 말씀한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3-14)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이렇듯 하나님의 언약은 묵시 속에서 온전히 완성하신 것을 역사 속에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에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19-22)라고 말씀하고 있다.

 

피조물이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말하며 고대하는(, 아포카라도키아)이라는 말은 아포’(~로부터)카라’(머리)데코마이’(앞으로 내밀다)의 합성어이다. 머리를 내미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 말로 목 빠지게 기다린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온전히 다 드러나는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찬양하였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19:1-4)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5)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참음으로 기다린다는 것도 내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도록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뜻이다. 세상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닌 세상 밖에서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기대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는 영광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라면 결국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이 세상의 것, 땅의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 사는 것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200705 강론/김영대).

 

 

롬41.0818-25 우리 몸의 속량(202007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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