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39강 로마서 8:7-11 육신과 영

불편한 진리 2020. 5. 18. 07:08

로마서 서른아홉 번째 강론


로마서 8:7-11


육신과 영

 

율법은 날마다 우리에게 죄를 고발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제 더 이상 죄라고 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에게 죄를 정하여 죽음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것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에 병들어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율법이란 인간의 행위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세워놓고 언약을 맺으셨지만 실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맺으신 언약을 시내산에서 나타내주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기에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걸고 맺으신 것이 언약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언약의 온전한 성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를 십자가로 나타내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가 되었기 때문에 정죄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 인간은 죄의 권세에 매여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날마다 죄의 법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시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다고 선언한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선언은 단순히 허세가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해방되었다는 최면에 걸리게 함이 아니라 실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생명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자기 백성들을 육신이라는 사망에 머물도록 두지 않고 생명을 누리도록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더 설명한다.


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가? 그것을 7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밝힌다. 여기서 원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크드라인데 예수님께서 밀과 독보리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13:24-25)라고 하셨는데 이 원수와 같은 단어이다. 그런데 이 비유를 풀어주시면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39)라고 하였다. 즉 마귀(, 디아볼로스)는 하나님의 원수요 대적자(사탄)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마귀를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마귀를 섬길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마귀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나 자신이 마귀이다. 그것을 성경은 혹은 육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라고 하였다. 우리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직장의 일이나 세상적인 일을 하면 육신의 일을 하는 것이고 세상 일 다 제쳐두고 예배에 참석하였으면 영의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예배, 찬양, 기도, 봉사, 전도, 주일성수, 십일조 드림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적인 일을 다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교회를 찾아 나온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며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고 교회의 일에 열심히 봉사를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우리의 착각이다. 아니 그것은 내 기쁨을 위해 한 것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자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육에 속한 것, 죄인의 것을 받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받으시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선언하시고 첫 걸음을 떼신 요단강 세례의 현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6-17/참고 마 17:5)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기쁨과 관련이 없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 영에 있는 것이고 그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곧 그리스도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게 번역이 되었는데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너희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지만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영의 존재이다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육 혹은 육신의 존재가 아니라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영의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내가 살았고 살게 되는 것은 오직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사는 것이 나의 잘남과 힘에 의해서나 건강을 잘 유지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고 영의 존재로 살게 하시는 것을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9절에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말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누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분을 증거한다고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6:13-14)


 

육신에 있는 자, 즉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찾아오셔야 영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말씀은 성도 안에 성령께서 거하신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이것을 하나됨으로 나타내고 있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옵나이다(17:21-24)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 이 목적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 십자가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이란 하나님과 화목된 상태이고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고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주님의 몸된 교회, 성도로서의 삶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주님은 우리를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해서 보시는 것이 아니다. 육체와 영혼의 구분이 성경에는 없다. 우리의 몸(全人), 이것 하나로 보고 말씀하고 있다. 이때 우리의 몸이란 단순히 우리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것으로서의 몸이다.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은 몸의 구원이고 그 몸은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러므로 11절에서 말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고 성령에 의해 은혜로 베풀어진 구원이기에 우리가 구원을 방해할 수 없고 취소시킬 수 없으며, 실패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린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장악하실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영의 존재가 된 자를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39-40)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슨 특별한 사명을 주어 세상을 바꾸는 어떤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됨은 이제 예수님 이용하고 성령의 능력 끌어와서 세상에서 한 몫 잡아보라는 뜻이 아니다. 영에 속한 자로 만들기 위해 성령으로 찾아오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하셨다. 그 성령에 의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 마음에 새겨져야 할 것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200517 강론/김영대).




롬39.0807-11 육신과 영(20200517).pdf




롬39.0807-11 육신과 영(20200517).pdf
0.1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