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37강 로마서 7:13-25 두 가지 법

불편한 진리 2020. 5. 4. 11:31

로마서 서른일곱 번째 강론


로마서 7:13-25


두 가지 법

 

어떤 철학자는 이 세상의 역사가 정반합을 통해 점점 좋은 세상으로 발전해 간다, 이것이 역사의 원리이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수 많은 철학 이론과 고전들에서 세상은 점차적으로 살기 좋은 세상, 유토피아나 또는 하나님 나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문명의 발전이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증거들이라고 착각한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에 대해 경각심을 주고 환경 오염의 문제들을 자꾸 제기하면서 함께 노력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고 다음 세대에 건강한 지구를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오늘날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함께하는 운동에 동참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교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점차적으로 살기 좋은 곳으로 유토피아나 하나님 나라로 발전해 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점점 발전하고 좋아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오히려 퇴보하고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재택근무나 원격 진료, 온라인 수업이나 화상 회의 등은 문명의 발전이 지향하고 있는 바였으나 격리되고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코로나-19로 인해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 끝에 유토피아같은 하나님 나라가 있으니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단한 비법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며 천국을 쟁취하는 쉬운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묵시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확정해 놓고 이루신 그 일을 이 땅의 시간 속에 펼쳐서 설명하고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점에서 묵시 속에서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속에 놓였고 종말을 선언한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묵시를 사는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킨다든지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인간의 행위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면 왜 천국으로 바로 데리고 가시지 우리를 이 땅에 살려 두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이렇게 힘든 과정의 구원을 하시는가? 하는 이런 여러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도 오늘날 교회들에서 답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 다니는 것 = 예수 믿는 삶, 교회 다니지 않는 것 = 예수 믿지 않는 삶으로 규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선하고 착한 삶으로 그 행위가 반드시 나타나야 하고 또한 그것이 예수 믿는 증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선하고 착한 우리의 행위가 나타나야 하는가?


로마서 6장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7-18)라고 하였고 또한 8장에 서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라고 하였기 때문에 7장에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라는 이런 말씀들이 6장과 8장의 문맥에서 맞지 않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본문에서 혹은 내가라는 표현에 대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이나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보거나 또는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바울, 또는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고백이기는 하지만 성령 체험의 경험이 없는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의 신앙이라는 주장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이거나 율법 아래에서 헤매던 시절 혹은 예수님을 믿었으나 연약한 신앙의 상태라는 주장들은 문장 자체가 현재형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예수 믿기 이전의 고백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헬라어 성경에서 7:7-13은 모두 과거형 문장으로 기록된 반면 7:14-25에서 24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구절만 미래형으로 기록되었고 나머지 구절들 모두 현재형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라는 이런 말씀들이 바울 자신의 과거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7:7-12 말씀을 통해 바울 사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드러났다고 해서 율법 자체가 죄가 되느냐고 물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자신이 살아서 자기 행위로 율법을 지켜내려고 하는 존재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죄인에게 율법의 본질이 보여주고자 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기에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했다(7:12).

그리고 오늘 본문 13절에서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다시 한 번 더 확인시켜주고 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하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율법으로 우리를 죽여야 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4)라고 현재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고 있다.


본문의 번역은 율법이 신령한 줄 알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뉘앙스를 줄 수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된 나는 신령하지 못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즉 바울 사도는 자신을 율법과 분리시키며 오히려 죄와 자신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인간이 죄의 권세에 붙잡혀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는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5-17)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바울의 이 고백은 죄가 행하기 때문에 자신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 책임 회피의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하였다. 즉 자신 밖의 죄가 아닌 내 속의 죄라고 표현함으로 자신과 죄를 분리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행하다’(, 카테르가조마이)라는 말은 생산하다’, ‘만들어내다라는 뜻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만들어지고 생산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계속 이어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8-20)라고 반복해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주셨지만 그 믿음에 의해 선을 원하는 것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죄의 권세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죄와 분리될 수 없는 상태에서 원하지 않는 악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창세 전 언약에 의해 묵시에 담겨 있어서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잡혀 있지만 시간을 살고 있는 역사적 관점에서는 악을 행하고 만들어내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1-23). 여기서 깨달았노니”(, 휴리스코)라는 말은 발견하였다는 뜻인데 바울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대립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하였는데 즐거워하되(, 쉬네도마이)라는 말은 ‘~와 함께 즐거워하다라는 뜻이다. 즉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속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진 의가 바로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믿음으로 자기 백성 안에 사는 것을 속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참고 고후 4:16, 3:16).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지만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육신은 늘 죄의 법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바울 사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선을 이루려고 하지만 선을 행할 수 없고 악행만 드러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곤고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곤고한(, 탈라이포로스)이라는 말은 비참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만 결국 율법 아래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고 거기서 우리 자신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율법이 지칭하는 바, 율법의 본질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찾아오실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라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마음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섬기노라(, 둘류오)라는 말은 예속되다’, ‘종이 되다라는 뜻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에 속했는가 죄의 법에 속했는가를 날마다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선을 행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위해 찬양과 기도, 전도, 헌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아니 그것이 우리의 죄악이다. 점진적으로 성화되거나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으로 세상이 점차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세상이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이다. 어디에 속하였는가 하는 것을 십자가로 날마다 확인할 뿐이다. 죄를 행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는 자가 성도이다. 바울 사도는 삶의 끝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는데 이것이 날마다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http://cafe.daum.net/joosung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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